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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지나친 곳에 조선이 잠들어 있다
  • 편집국
  • 등록 2025-09-15 08:56:03
  • 수정 2025-09-29 09:5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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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광교신도시는 오늘날 경기도를 대표하는 신흥 도시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초현대적 상업 시설, 그리고 오피스빌딩들이 조화를 이루며 생동감을 자아낸다. 거리를 가득 메우는 자동차의 행렬, 카페마다 북적이는 청년들의 웃음소리, 아이들과 가족들이 오가는 산책로는 활력이 넘치는 도시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활기와 소란 뒤편,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언덕에는 우리 역사의 한 조각, 조선 태종의 아홉 번째 아들 혜령군 이지(李祗, 1415~1469)의 묘가 고요히 잠들어 있다.


 불과 우리 학교에서 30분 거리에 있었지만 무심코 지나쳐 온 이 묘역을 우연히 찾게 되었을 때, 나는 문득 묻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묘역은 혜령군과 부인 윤씨의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아들 예천군, 손자 축산군의 묘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이는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조선 왕실이 중시한 ‘가족’의 의미를 공간적으로 구현한 하나의 문화적 상징이라 할수 있다. 신도비에는 세종이 내린 시호 ‘양회(良懷)’가 새겨져 있어, 조선의 한 왕자가 지닌 삶의 궤적과 더불어 왕실 문화의 품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 묘역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화려함이 아닌 ‘엄숙한 조화’다. 봉분의 높이와 석물의 배치, 나지막한 언덕의 질서정연한 구조는 조선 시대 묘제의 전형성을 따르고 있으며, 이는 유교적 가치관이 공간 속에 반영된 결과이다. 무덤은 단순히 죽은 자의 흔적이 아니라, 후손이 삶을 성찰하는 장치였다. 오늘날 우리가 이곳을 다시 바라보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혜령군 묘역만이 수원이 품은 조선의 흔적은 아니다. 팔달산 아래 자리한 수원화성(華城)은 정조대왕의 효심과 개혁정신이 응축된 성곽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보편적 문화유산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능(융릉)을 참배하기 위해 행차하던 길은 오늘날 화성행궁과 함께 시민들에게 열려 있으며, 매년 열리는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 행사는 수원이 단순한 도시를 넘어 역사와 문화를 계승하는 무대임을 증명한다.


 또한 수원에는 조선 왕릉의 중요한 일부인 융건릉이 있다. 이곳은 사도세자와 정조의 부자(父子)가 나란히 잠든 장소로, 비극과 효심, 그리고 왕조의 정치적 드라마가 응축된 유적이다. 더 나아가 광교산에는 성곽 터가 남아 있어 수원의 군사적, 지리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조선 시기의 사찰과 향교 또한 산재하여 지역사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이 모든 유적들은 수원이 단지 근대 도시 개발의 산물이 아니라, 오랜 세월의 역사적 기억 위에 세워진 공간임을 일깨운다.


 도시화와 개발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과거를 지우는 대신, 기억을 새롭게 호흡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문화도시’의 출발점이다. 혜령군 묘역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곳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과거를 성찰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역사와 공존할 것인가를 묻는 거울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적은 물리적 보존만으로는 온전히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이 시민들의 삶 속에서 기억되고 교육되어야만 진정한 보존이 된다. 눈을 들어야 보이고, 멈추어야 읽을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은, 우리의 관심과 참여 없이는 금세 사라지고 만다. 역사적 사적이 우리 일상 속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시민이 ‘역사의 주체’임을 일깨워 준다.


 이제 2학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나는 특히 우리 학생들에게 한 가지 권유를 하고 싶다. 공부와 취업 준비, 다양한 활동으로 바쁘겠지만, 하루쯤 짬을 내어 광교의 혜령군 묘역이나 수원 화성, 융건릉을 찾아가 보자. 그곳은 교과서 속 활자나 시험 문제의 배경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땅 위에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역사다. 직접 걸으며 보고 느낄 때, 우리는 조선의 한 왕자가, 정조와 사도세자가, 그리고 그 시대의 백성들이 호흡했던 시간을 공감하게 된다.


문화도시 수원은 단순히 유적을 보존하는 공간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열린 교실이다. 학생들이 이곳을 찾는 것은 단지 옛 무덤을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간’과 ‘우리의 역사’를 연결하는 행위다. 그리고 이러한 작은 실천이 모여, 진정한 의미의 문화적 시민성을 길러낼 것이다.


 나는 바란다. 혜령군 묘역이 우리에게 단지 조선 왕자의 무덤으로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과거와 대화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하나의 거울이 되기를. 나아가 훗날에는 오늘의 평범한 시민들의 삶 또한 존엄하고 단정하게 기억될 수 있기를. 그것이야말로 우리 학생들과 이 도시의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 가야 할 수원의 미래이며, 문화도시로서의 사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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