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흩뿌릴 듯이 꾸물거렸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된 동호는 어딘가 울적한 분위기를 풍기는 거리를 가로질러 도청 상무관으로 향했다.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동호의 머릿속은 정대에 대한 생각으로 들어차 있었다.
얼마 전 있었던 시위 현장이 마치 전생처럼 떠오른다. 계엄군의 총탄 소리가 얼얼하도록 울려 퍼지며 아수라장이 된 거리. 총격을 피해 달아나지만 옆구리에 총을 맞아 쓰러지는 정대. 머릿속에 재생되는 그날의 기억을 떨치며 정대의 시신을 찾기 위해 발길을 급히 옮겼지만, 계속해서 밀려드는 희생자들로 인해 작은 일손이라도 돕게 된다. 마스크를 써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강당에서 동호는 분주히 돌아다니며 머리맡에 놓인 음료수병에 초를 밝혔다. 온통 사색이 돼 가족을 찾으러 온 사람들에겐 피가 말라붙은 천을 걷어 얼굴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계엄군의 습격이 예정되며 위험이 가중되던 저녁, 집으로 돌아오라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청에 남았던 동호는 결국 계엄군의 급습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만다.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뜨거운 면도날로 가슴에 새겨놓은 것 같은 그 문장을 생각하며 그녀는 회벽에 붙은 대통령 사진을 올려다본다.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소년이 온다』 中
책 <소년이 온다>는 지난 2014년에 발표한 한강의 6번째 장편소설이다. 총 6장으로 이뤄진 이 책에선 각기 다른 인물의 시선으로 1980년 5월의 광주를 조명함과 동시에 5.18민주화운동 당시 숨죽이며 고통받은 무고한 이들의 말 없는 혼을 어루만진다. 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에도 살아남았지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거나, 견디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 등. 저자는 살아있다는 것을 치욕스러운 고통으로 여기거나, 일상을 회복할 수 없는 이들의 말로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작가 특유의 섬세하며 강렬한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그 시절 그 안에 숨 쉬던 이들의 이야기를 거듭 되풀이하게 만든다. 그들이 겪은 공포와 상처가 지금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것을 기억해 달라는 듯이.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순간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는 종종 역사적 사건 이후의 삶을, 마치 당연한 듯이 여기곤 한다. 이 책이 다루는 5.18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는 지난날의 유산일 뿐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만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지나간 날들에 대해 무관심해진 우리에게 작가는 말한다. 동호가 △5년 뒤 △10년 뒤 △20년 뒤 △30년 뒤에도 우리에게 천천히 넋으로 걸어오는 것을 상상하며 제목을 짓게 됐다고. 그날의 이야기는 아직까지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에게 소년은 오고 있다고.
박상준 기자 | qkrwnsdisjdj@kyongg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