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암흑의 삶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2020년 5월 말 기준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중복 등록한 장애인의 인구는 9,198명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중복 등록 방법을 모르는 사람과 증상이 추후에 나타났지만 추가로 등록을 하지 않은 경우까지 합한다면 실제로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은 증상과 장애발생시기가 다양해 여러 유형으로 분류된다. 대표적으로 장애 정도에 따라 △시각과 청각 모두 전혀 활용할 수 없는 전맹전농인 △잔존청력만을 활용하는 맹난청인 △잔존시력만을 활용하는 저시력농인 △시력과 청력이 모두 잔존하는 저시력난청인으로 나뉜다. 증상에 따라 의사소통 방식도 여러 가지다. 전맹전농인의 경우 수어를 하고 있는 상대방의 손을 직접 만져 수어내용을 이해하는 촉수화와 손바닥에 한 글자씩 적어 촉감을 통해 파악하는 손바닥 필담을 활용한다. 맹난청인의 경우 잔존청력에 의지해 활동보조사의 통역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저시력농인의 경우 잔존시력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수어를 하는 근접수어를 통해 이해한다.
하지만 이들은 활동지원사나 촉수화통역사가 없다면 의사소통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영위하기도 힘든 실정이다. 지난 2017년, 한국장애인개발원에서 조사한 ‘시청각중복장애인의 욕구 및 실태조사 연구’ 자료에 따르면 1개월간 외출하지 못한 시청각장애인의 비율은 14.5%로 전체 장애인(5.2%)보다 3배 높은 수치로 나타났다. 또한 의무교육조차 받지 못한 시청각장애인의 비율(32.7%)도 전체 장애인(11.6%)보다 높은 것으로 볼 때 시각과 청각이 함께 상실된 이들의 어려움은 단순히 두 장애의 덧셈이 아닌 곱셈인 것이다.
복지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시청각장애인
현행법상 시청각장애인은 15개의 장애 유형에 속하지 않아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로 중복 등록해야 한다. 하지만 중복 등록하더라도 청각장애인에게 제공되는 수어통역은 보이지 않고 시각장애인에게 제공되는 음성해설은 들리지 않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동은 시각과 청각뿐만 아니라 다른 장애도 동반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나라는 주장애와 부장애로 최대 두 가지만 등록 가능한 탓에 결국 충분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언어 발달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까닭에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별도의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다른 중복 장애는 상호 보완 관계에 있는 다른 감각이나 도구로 대체가 가능하지만 시청각장애인의 경우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각과 지체장애를 함께 가지고 있다면 시각은 청각으로, 지체장애는 보조도구로 대체가 가능하다. 하지만 서로 보완해야 하는 시각과 청각이 합쳐져 버린 시청각장애인은 음성지원을 들을 수 없고 수어는 볼 수 없다. 이에 따라 장애를 대체할 다른 방법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별도 지정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상황
사각지대에 놓인 시청각장애인을 돕기 위한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2019년 4월부터 밀알복지재단은 ‘헬렌켈러법’으로 불리는 시청각장애인지원법 제정 운동을 통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지난 2019년 12월 장애인복지법이 개정되면서 시청각장애인을 ‘시각 및 청각기능이 손상된 장애인’이라고 정의했으며 국가와 지자체가 시청각장애인을 위해 지원해야 한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하지만 의무가 아닌 권고 수준으로 현재까지 실태조사만 이뤄지며 이후 대책은 없는 상황이다. 또한 밀알복지재단 홍유미 헬렌켈러센터장은 경기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정부와 지자체가 시청각장애인을 기존의 장애인 정책과 포괄하려고 하지 말고 별도의 장애 유형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후 지난 2022년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법률안이 제출됐지만 2년 넘게 국회에서 계류 중으로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별도의 정책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보건복지부는 다른 중복 장애인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시청각장애인만 별도의 장애로 지정하면 형평성이 깨진다는 주장이다.
이에 본지는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전문적인 의견을 듣고자 ‘헬렌켈러 시청각장애인 학습지원센터’의 정우석 센터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정 센터장은 시청각장애인이 별도의 장애로 지정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다른 장애 유형에 비해 시청각장애인의 통계적 수치가 적을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이 어려워 자신들의 처지를 알릴 방법이 없다”며 “결과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한 명이라도 필요하면 제공돼야 하는 것이 복지”라며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법의 별도 지정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직접 그들의 삶에 다가가 보다
기자는 시청각장애인의 현실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 12일 서울시 소재의 ‘헬렌켈러 시청각장애인 학습지원센터(이하 학습지원센터)’에 방문해 자조모임 현장을 취재했다. 학습지원센터는 서울특별시(복권기금)의 지원을 통해 작년 7월 개소해 시청각장애인의 자립 능력을 향상을 위해 생애주기별 맞춤형 학습지원을 하며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시청각장애인들의 매주 목요일 자조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자조모임 시간에는 일상생활 속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음식 만들기 프로그램부터 함께 추억을 쌓기 위해 여행을 가는 등 여러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기자가 방문한 날은 슐런이라는 스포츠를 체험하는 날이었다. 슐런은 나무보드 위에서 퍽을 홀에 넣어 점수를 내는 스포츠로 특별한 운동 신경을 필요로 하지 않아 노인과 장애인 재활로 적합한 운동으로 꼽힌다. 센터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체육시설에 모두 모여 각자의 활동보조사의 도움을 통해 설명을 들은 후 게임이 시작됐다. 모두 즐겁게 게임하는 모습을 보며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세상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 학습지원센터에서 동료상담사로 일하고 있는 손창환 간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시청각장애인의 삶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봤다. 먼저 손 간사는 선천적 농아인에서 이후 시야가 흐려지며 전맹전농이 된 경우였다. 현재는 학습지원센터에서 점자와 점자정보단말기 사용을 교육하며 밖에서 활동하지 못하는 전국의 시청각장애인을 발굴하는 일을 하고 있다. 손 간사는 “교육하는 데에 있어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일상생활에서 항상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 힘들다”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법안 제정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또한 “전 세계에 있는 시청각장애인에게 큰 빛이 돼 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때
시청각장애인을 별도로 지정한 해외 사례를 본받아 우리나라도 이들을 도울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미국은 1967년 헬렌켈러의 이름을 딴 법을 마련해 가장 먼저 시청각장애인을 법적으로 정의했다. 또한 시청각장애인 학생을 위해 시청각 전문교사를 확충시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추가로 성인 시청각장애인에게는 지원서비스 제공자와 청각장애인 통역사 서비스를 제공한다. 독일도 미국에 이어 지난 2016년 시청각장애인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보조인 서비스 제공 확충 및 전문 교육 과정도 진행하고 있다. 정책은 주거까지 확대됐다. 독일 전역에서 프로젝트 모델형식으로 시작된 ‘시청각장애인 지원주거’는 당사자들끼리 거주하는 공간으로 점자프린트, 여가활동기기 등 보조기기가 설치돼 있다. 또한 특수교사와 사회복지사 등 인력을 지원하며 이들을 위한 정책을 실현 중이다.
더불어 정 센터장은 “정확한 통계가 있어야 그에 따른 정책이 나올 수 있다”며 “정확한 통계를 위해 일상생활의 어려움으로 집에서만 숨어 사는 시청각장애인들을 발굴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에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은 전국에 4곳밖에 없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때문에 정 센터장은 “지방에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시설이 마련돼 소외되는 사람들이 없어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일상생활을 배우고 자립심을 기르기 위해서는 시청각장애인만을 위한 복지관이 필요하다”며 “아동들의 경우 특히 더 절실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정 센터장은 “현재 학습지원센터는 총 5명으로 충분한 서비스를 제공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며 예산 또한 마찬가지”라며 “정부의 지원과 더불어 홈페이지를 통해 후원도 받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한다”고 전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시청각장애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별도의 장애 유형으로 분류돼 맞춤형 혜택을 제공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의사소통이라는 벽 때문에 다른 장애보다 목소리를 내는 데에 곱절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의 작은 공감과 꾸준한 관심이 모인다면 결국 사회도 함께 변화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글·사진 정예은 기자 Ι 202412382@kyongg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