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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고통이 상흔이 될 그날을 고대하며
  • 이수민 기자
  • 등록 2024-09-02 16:2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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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 13일, 뉴욕타임스 선정 ‘21세기 100대 도서’ 중 15위에 오른 화제의 책, 이민진 작가의 장편소설 ‘파친코’는 장장 30년간의 탈고를 거쳐 지난 2017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 일제강점기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기반으로 한 탄탄한 서사와 중간중간 촘촘히 수 놓인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묘사가 백미인 ‘파친코’는 최근 김민하, 이민호 배우 주연의 드라마로도 제작되며 또 한 번 재조명 받고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 선자의 계보에 따른 3부 구성으로 진행되며 파친코 1부는 그녀가 당찬 어린 시절을 지나 첫사랑 ‘한수’를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두 사람의 악연 같은 인연은 한수가 우연한 기회로 일본인들에게 겁탈당할 뻔한 선자를 구해줬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선자의 올곧음에, 그녀는 한수의 영리함에 속절없이 빠져들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 사이에는 아이가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선자는 한수가 생선 중매상이 아닌 당대 서열 2위 야쿠자의 양아들이며 오사카에 처자식을 둔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길로 깊은 상실감에 빠진 그녀는 어머니 양진과 함께 운영하던 하숙집에서 평양 출신의 젊은 목사 ‘이삭’을 만나 구제받는다. 이삭과 혼인을 올린 후, 선자는 평생을 바쳐 살아온 고향을 등지고 그의 형 ‘요셉’과 요셉의 아내 ‘경희’가 살고 있는 오사카로 떠나 그곳에서 한수의 아들 ‘노아’와 이삭의 아들 ‘모자수’를 출산하고 혹독한 이민 여성의 삶을 감당해 나간다.

                   

“역사는 우리를 져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파친코』 中

                   

 수많은 독자가 명문장으로 꼽은 이 구절은 소설의 서두에 등장해 이민진 작가 특유의 무겁고 엄숙한 문체로 독자를 압도한다. 이는 비단 일제의 가혹한 통치 속에도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고 피어난 세대들의 신념을 압축할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하게 한수의 아이를 갖게 되면서 끊임없이 야쿠자의 그늘에 발목 잡히는 기구한 그녀의 삶의 요약본이기도 하다.

                   

 소설 속 선자의 삶은 부산의 매서운 파도와 세찬 바닷바람과 똑 닮아있다. 단 한 번도 관대한 적 없었던 인생의 고난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었던 한반도의, 더 나아가 한민족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소설 ‘파친코’는 선자의 인생을 비춰 오늘날 국내 독자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용기를 전한다. 우리 선조들이 오랜 핍박의 역사를 견뎌온 것처럼, 지금 이 책을 펼쳐 든 당신의 삶에 크고 작은 문제들이 숱하게 일어날 지라도 반드시 이겨내리라고 말이다.

                   

이수민 기자 Ι leesoomin22@kyongg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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