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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문(Honeymoon)과 비터문(Bittermoon)의 운이(運夷) 원리
  • 편집국
  • 등록 2022-04-11 09:57:54
  • 수정 2022-05-18 13: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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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과 사람, 남성과 여성이 만나서 서로 가까워지고 혼인을 하는 것이 생멸의 깊은 이치가 된다. 허니문이 비터문이고, 비터문이 허니문이라고 하는 역설을 예거한다. 밀월관계는 영원할 수 있는가, 형극관계 역시 영원할 수 있는가? 둘은 서로 긴밀하게 관련되는 것이다. 밀월이 형극이고, 형극이 밀월이다. 관계는 항상 오고가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부부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이제 이를 더욱 확장하여 새로운 것으로 전환하는 뜻이 필요하다. 


 밀월(蜜月)은 꿀과 달을 말한다. 형극(荊棘)은 가시밭길을 말한다. 혼인하는 신혼 초야에 이러한 밀월과 형극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우월과 저열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이들이 만나서 일생을 함께 할 수 있는가?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보다 더욱 나은 미래가 보장되는가, 그들은 영원하게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는가?


 남녀 관계가 이러할진대 이와 다른 인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여야관계에서 밀월과 형극이 있는가? 이들의 관계를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남녀관계도 복잡한데, 이와 다른 사회관계는 전혀 오리무중이다. 이들의 관계를 새롭게 극복하면서 생성과 극복, 생성과 소멸을 함께 논할 수가 있는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가 있는가? 이 전쟁의 형극을 해결하면서 밀월관계에로의 연착륙이 가능할까?


 허니문과 비터문은 상극과 상생을 가능하게 하는 대등이 핵심이다. 균형이 잡힌 시각이 필요한데, 이 견해가 없기 때문에 서로 다툼이 일어나고 다툼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 균형과 불균형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이루 무력한 심정에 문제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허니문을 비터문으로 바꾸고, 비터문을 허니문으로 바꾸는 방안이 있는가? 그것에 숨은 원리가 있다. 이 원리를 찾아서 정리하여야 한다.


 운이(運夷)라고 하는 말이 있다. 세상 천지만물은 돌고 돌아 결국 고름에 이른다는 뜻이다. 이루어지면 허물어지고, 차면 기울고, 더함이 있으면 덜함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이 균형을 생각하고 욕심을 덜어내면 새로운 방식으로 극복하여 나아갈 수 있다. <<노자>> 제77장에 한 말이 있다. ‘하늘의 도는 활을 팽팽하게 당기는 것과 같다. 높은 것은 누르고, 낮은 것은 들어 올려주고, 남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태준다’(天之道 其猶張弓乎 高者抑之 下者舉之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고 말한 바 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각기 우위에 설려고 하니까 생기는 문제가 갈등이 된다. 고위와 하위, 빈천과 부귀가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의 하찮은 욕망이 천도를 무심하게 하고, 생성과 극복의 실타래를 꼬이게 한다.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함부로 하고, 순환와 전환을 우습게 보는 이들에게 깊은 좌절을 줄 것이고, 스스로도 무너지게 될 것이다. 천도가 무심한 것은 아니리라!


 시대가 달라지고 있으나, 시대를 거스르는 이들이 너무 많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나이 어린 사람들을 모두 늑박하고 있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에게 배우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고집대로 이들을 옭아 넣으려고 하면서 자신들을 너무도 모른다고 치부한다. 사람의 관계는 처음에 잘 드러나지 않다가 결국 이해관계로 전환하게 되면 여기에 깊은 충돌을 하게 된다. 양보와 협화가 전혀 통하지 않게 된다. 


 갑자기 높은 지위를 가지고 그것을 끊임없이 쫓아가게 되면 여기에 우리의 허망함이 있는 줄을 모르게 된다. 어떻게 하면 이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가? 그것에 숨은 비밀은 인정하는 것이다. 허니문과 비터문은 벌거벗은 상태에서 서로를 보는 것이 요점이다. 거기에 무슨 왜곡과 가식이 있을 수 있는가? 인정하고 부인하면서 살 일은 아니다. 욕망을 내려놓은 것으로 우리를 이끄는 힘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 처음에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는가? 만나서 사랑으로 살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무슨 요구와 불만, 우월과 저열이 갈라질 수 있는가? 돌고 도는 것의 이치를 생각하고 이제 겸손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미래의 설계가 가장 중요하다. 과거의 문제가 우리를 얽어매서는 안된다. 대통령 당선인과 시민의 밀월과 형극 역시 이러한 각도에서 문제되어야 한다. 허니문과 비터문의 경계보다 이들의 역동적인 앞날이 어떻게 될지 기대와 걱정이 교차한다. 이 또한 정해진 답이 없다. 오로지 순종하고 전개되는 과정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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