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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깨우치는 말과 글
  • 편집국
  • 등록 2022-03-14 08:25:06
  • 수정 2022-05-18 13: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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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프다! 세상이 미망에 빠진지 아주 오래되었다. 학문을 한다며 남의 이야기만 한지 너무나 오래되었다. 자신의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학문을 하지 않고, 구구절절이 남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조목조목이 남의 학문을 지절거리고 있어온 지 사뭇 오래되었다. 별안간 방송에서 소스라치게 깨우치는 말을 들었다. 나 자신의 학문과 학문하는 각성을 다시금 가다듬는 계기가 되었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밝은 태양이 허공에 떠 올라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데, 어찌하여 한 조각 구름에 가로막혀 그 빛을 멈추는가?"

 "사람마다 자기 그림자와 잠시도 떨어지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그림자를 밟아 볼 수 없는 걸까?"

 "온 대지가 불덩이와 같은 데, 어떤 삼매를 얻어야 불타지 않겠는가?" 


- 용인 법문사 혜윤 -

   

 항용 써온 말이기 때문에 그게 그것 같지만, 낡은 말이 새로운 뜻을 가지고 있어서 절실하게 다가온다. 여래의 설법에 첫 번째 말은 태양은 어둠에 걸리지 않고 어디에든 간다는 비유와 다르다. 하지만 그것대로 신실한 뜻을 가진다. 지혜의 본성은 태양이지만 사람의 근기가 어둡거나 깊은 번뇌의 조각 구름이 결국 태양빛을 가로막아 빛이 멈추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태양에게 배우고, 성현에게 배우고, 책에 배우면서도 자신의 학문이 삿된 먹장구름에 가로막혀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고 이러한 말을 생각하자.


 두 번째 말은 한층 새롭다. 이제 빛을 자신에게 되돌리고 있어서 문제의 전개 양상이 심상치 않다. 슬기의 본성이 남겨 놓은 자신의 분신이 바로 그림자이다. 언제나 태양이 비추게 되면 자신과 단 하루라도 떨어지지 않고, 늘 언제나 곁에서 함께 하는 사람과 사람의 그림자 가운데 자신의 그림자를 밟아본 사람은 거의 없다. 나 자신이 없으면 항상 없고, 나 자신이 있으면 늘상 있는 그림자라도 어찌할 수 없다. 자신의 마음이 이와 같은 것은 아닌가?


 세 번째 말은 짧은 글월을 휘갑하는 것이다. 산하대지의 비유를 쓴다. 산하대지는 참 빛이지만, 산하대지 역시 이와 달리 불타는 덩어리일 수도 있다. 나의 마음이 참다운 각성을 하지 않는다면 산하대지의 뜨거운 불덩이는 식힐 수 없다. 한 생각의 끝자락이 차가운 얼음덩이가 되어서 불타는 산하대지를 차갑게 식혀야만 한다. 생각이 남다르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저 혼란과 미망의 산물일 따름이다. 남의 것이 커 보이고, 남의 것이 훌륭하다는 생각은 결국 나의 것이 없다고 하는 생각과 같은 것일 따름이다. 


 불교는 마음공부의 가장 종요로운 비결이 된다. 자신의 마음을 절절하게 다잡아 삿된 것에 움직이지 않고, 동시에 삿된 지식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각성의 슬기와 빛을 보태주는 것이 불교의 마음공부이다. 지눌이 마음 공부를 하는 비결에 대한 말을 한 것과 비교될 수 있다. 마음 공부를 하고 나의 마음이 참다운 주체임을 말한 것이다. <수심결>(修心訣)의 서문 초앞 비두이다. 

   

嗟夫 今之人迷來久矣 不識自心是眞佛 不識自性是眞法 欲求法而遠推諸聖 欲求佛而不觀己心 若言心外有佛 性外有法 堅執此情 欲求佛道者 縱經塵劫 燒身煉臂 敲骨出髓 刺血寫經 長坐不臥 一食卯齊 乃至轉讀一大藏敎 修種種苦行 如蒸沙作飯 只益自勞爾 但識自心 恒沙法門無量妙義 不求而得

(슬프다. 지금 사람들은 미혹해 온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제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본성이 바로 참다운 법임을 알지 못하여 법을 구하려 하면서도 멀리 성인에게 미루고, 부처를 구하려 하면서도 제 마음을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 하고, 성 밖에 법이 있다 하여, 이 소견을 고집하면서 부처의 도를 구하려 한다면, 티끌처럼 많은 겁이 지나도록 몸을 사루고 팔을 태우며, 뼈를 깨뜨려 골수를 내고, 피를 짜서 경전을 베끼며, 언제나 앉아 눕지 않으며, 하루에 밥을 묘시(卯時)에 한번만 먹으며, 나아가서는 대장경을 전부 다 읽고, 갖가지 고행을 닦더라도, 그것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다만 수고(手苦)를 더할 뿐이다. 다만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안다면 항하사(恒河沙)의 법문과 무량한 묘의(妙意)를 구하지 않아도 얻을 것이다.) 

   

 한 시대의 가르침을 펼쳤던 지눌의 말은 자신의 슬기를 찾을 수 있는 지침이 된다. 삭막한 시대에 등불을 밝히고, 널리 어둠을 몰아냈던 지혜로운 구절이다. 앞의 법문이나 뒤의 글은 결국 같은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부처임을 깨닫는 것이 긴요하다. 남의 말을 가지고 자신의 말처럼 여기는 것은 헛된 수고를 더하는 것이며, 다만 모래를 삶아 밥을 짓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는 학문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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