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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間偉人(월간위인)] 6월의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조승화
  • 등록 2021-05-31 09: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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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번이나 한국을 국제전에서 구해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6.25 전쟁과 제2연평해전 등의 사건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념하는 달이다. 당시 우리나라 국민뿐만 아니라 다수의 외국인도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인 아이젠하워다. 이에 본지는 아이젠하워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 정복을 목적으로 한 △나치독일 △일본제국 △이탈리아 왕국 중심의 추축국과 이를 저지하려 했던 △미국 △소련 △영국 중심의 연합국 간에 발생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는 각각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등장으로 파시즘의 길을 걸었고 일본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군국주의 성향을 띠며 적극적인 대외팽창을 시도했다. 이러한 서로의 입장이 일치하면서 1940년 삼국 동맹 조약이 체결돼 전 세계를 무대로 전쟁이 전개됐고, 그 결과 추축국이 차례대로 항복을 선언하면서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종전 이후에도 여러 국가 간에는 갈등과 긴장이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자본주의 진영의 미국과 공산주의 진영의 소련을 주축으로 한 냉전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냉전 체제가 전개됨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분단됐다. 이로 인해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다시 한번 국제전이 발생했고 1953년 휴전 협정 체결 후 소련이 해체되기까지 냉전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부터 6.25 전쟁까지 한국은 한 미국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받았는데, 그 인물이 바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다.


히틀러의 기세를 꺾은 전쟁 영웅


 아이젠하워는 독일계 스위스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군인이 되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 사관학교인 웨스 트포인트에 입학해 보병 소위가 됐고 직속 선배인 더글라스 맥아더의 전속부관으로 9년 동안 일했다. 이후 맥아더의 추천으로 육군 대령으로 승진했고 능력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인 1942년에는 조지 마셜의 추천으로 중장으로 진급해 북아프리카 전역에 참전했고 다음 해에는 원수 자리에 올라 유럽 연합군 총사령관이 됐다.


 유럽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된 아이젠하워는 나치 독일의 기세를 꺾기 위해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감행한다. 아이젠하워는 D-Day인 1944년 6월 6일 하루에만 8만여 명을 상륙시켰고 이후 3주 동안 총 156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독일군은 두 달 동안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끝내 서부전선의 정예군이 무너지고 독일에 점령된 상태였던 프랑스가 해방됐다. 이로 인해 나치 독일의 기세가 꺾여 패전에 영향을 미쳤고 제2차 세계대전의 승기 역시 연합군 측으로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냉전 속의 평화주의자


 노르망디 상륙 작전 등으로 미국의 전쟁 영웅이 된 아이젠하워는 종전 후 무수한 정계 진출을 제안받았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1952년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나서서 55.2%의 지지를 얻어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이 됐다. 선거 운동 기간 아이젠하워는 당시 미국의 반전 여론을 수용해 장기화되던 6.25 전쟁의 종전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실제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한국을 방문해 정체 상태에 빠져 있었던 정전 협정을 주도했다. 그 결과 1953년 정전 협정이 최종 체결돼 남북한의 지위를 인정하고 비무장지대를 설치해 군사적 충돌을 예방했다.


 6.25 전쟁 이후 더욱 공고해진 냉전 체제 속에서 아이젠하워는 대립보다는 평화를 추구했다. 비록 무산됐지만 소련의 흐루쇼프 서기장을 만나려고 하거나 수에즈 전쟁을 종식시키는 등 공산주의 진영과의 충돌을 자제했다. 이렇듯 그는 ‘데탕트’를 중요시해 40여 년간 진행된 총성 없는 전쟁 속에서도 평화를 추구해 군산복합체를 견제하는 등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조승화 기자│tmdghk0301@kg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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