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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학문의 혁신적 인식과 학문의 총괄
  • 편집국
  • 등록 2021-04-13 16: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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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학문은 개명한 이 시대에 이제 거의 필요 없는 것처럼 말하는데 이는 단견이다. 전통학문 가운데 어떠한 것을 계승하는가에 전통학문 혁신의 향배가 달려 있다. 전통학문과 외래학문을 대립적으로 인식하거나 지양하려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전통학문의 정수를 잇고 전통학문의 핵심을 승계하면서 혁신해야 하는 것이 선결되어야 할 조건이다. 전통학문은 고리타분하다고 하는 것이 널리 만연해 있다. 치우친 견해나 선입견을 거부하고 가장 높은 학문을 이으려고 하는 것이 첩경이다.

전통학문의 요체를 가장 높고 선구적으로 보여준 영역의 학문이 바로 철학이다. 철학은 이치를 따지고 문제의 행방을 명확하게 인식하는데 자못 도움이 된다. 최한기(崔漢綺, 1804-1877)가 이룩한 기학의 전통학문과 기학의 총체는 동아시아문명권의 철학에서 가장 돌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최한기는 자신의 학문이 그렇게 높게 올라간 줄도 전혀 몰랐을 수도 있다. 그는 묵묵히 당대의 성리학이 지닌 맹점과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새로운 글쓰기와 학문적 섭렵에 의한 대안으로 전통학문 혁신의 길을 찾았으며, 최한기의 학문적 글쓰기는 새로운 혁신을 꾀한 일이 되었다. 도저한 서구열강의 도전에 맞서서 맵자하고도 첨예하게 논쟁하면서 동아시아학문의 정수에 대한 정점을 찍었다. 전통학문의 상한가를 기록한 셈이다.

  최한기가 19세기 상황을 요약해서 발언한 것을 보면 무척 긴요하다. ‘중국을 배우는 사람은 서양의 서양 학문을 배우려고 하지 않고, 서양의 학문을 배우는 사람은 중국을 배우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모두 한쪽에 치우쳐 두루 통하지 않는 학문이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중국의 학문과 서양의 학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므로 한 마디 한 마디가 거의 절실하다. 이처럼 절실한 말이 어디에 있는가? 학문의 동서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발언을 선진적으로 한 바 있다.

  게다가 최한기가 쓴 글에 다음과 같은 학문을 급수를 정한 것이 있다. 최한기의 간명하나 이치가 섬부한 글이 있어서 이를 인용하면서 학문에 대하여 논할 필요가 있다. 기의 분수에 대한 정치한 사고의 말이 있어 음미할 만하기 때문이다. ‘높은 학문은 기()로 듣고, 중간 학문은 마음()으로 듣고, 낮은 학문은 귀()로 듣는다. 귀로 듣는 사람은 학문이 피부(皮膚)에 있고,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학문이 가슴(胸臆)에 있고, 기로 듣는 사람은 학문이 천하(天下)에 있다. 보는 것도 이와 같다. ………… 학문의 등급과 숫자가 비록 이와 같아도 그 실상은 하나라도 빼뜨리는 것이 불가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겸하고 서로 교제해야만 온전하다. 중도에 폐기하는 사람이나 성취가 있지 않은 사람에게 이르러서 상하의 미치는 것의 한계가 저절로 있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다. 절실한 발언이므로 다소 인용이 길어졌다.

  학문을 상하로 크게 셋으로 구분하고, 이 학문이 듣고 보는 것의 방식과 폭에 대한 학문의 구체적 예증을 먼저 들었다. 학문의 등급을 나눈 준거는 포괄하는 범위와 심도이다. 상학은 기로 듣고 기로 본다고 하였으니 기 자체를 다루는 것은 곧 보편자인 기를 대상으로 우주삼라만상과 천지만물의 보편적 원리나 이치를 참구한다. 중학은 기의 보편자보다 실제로 들리는 소리나 현상의 심층을 가슴 속이나 마음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심리나 심안으로 하는 학문을 중학이라 한다. 하학은 이와 달리 감각적 기관에 입각하여 파악하는 학문이다. 경험적이고 직접적인 보고 듣는 것에 치중한다.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 치중하는 학문이다.

  학문을 상하로 구분하는 것으로만 치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학문의 갈래나 영역 그리고 등급이 맺는 상호관계를 더욱 중시하였으니 그것이 지남이다. 나누기만 하지 않고 통합하는 관점으로 학문의 상호영역 관계를 분명하게 하였다. 그 학문은 차등의 관점에서 논하지 않고 대등한 관점에서 서로 상생하고 상극하는 것이다. 이를 항상 소통하고 교통하는 것은 겸해야 한다고 하였다. 문제의 핵심은 대등한 관점에서 서로 필요한 관계이지만 성취나 학문의 완성에 있어서는 상하의 학문적 파급의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고 하여 증험하는 바의 효과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학문은 모두 대등한 바이되 결국 성취 여부나 등급의 정도는 결국 완성에 있으며, 완성의 학문을 향한 일정한 성취를 바람직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학은 기화의 모든 경험과 열력을 누적해야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점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완성의 학문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상학은 단박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갈고 닦아서 완성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학문의 등급은 중도에 포기하는 것이나 이룩하지 못한 것에서 저절로 한계와 한정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하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그러한 점에서 학문의 갈래나 정도가 중요한 준거는 아니다. 끝까지 마쳐 완성하는 것에 상학이 결정되는 점이 사실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의 학문을 해도 완성이 되지 않는 학문은 결단코 상학일 수 없다. 전통학문은 등급이 있지 않다. 스스로 착상하고 이를 전개하게 되면 새 시대의 학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최한기의 학문으로 배울 점이 너무 많다. 서양학문을 극복하는 길이 여기에 있을 줄 안다. 대학의 본디 임무가 학문의 쇄신이나 전통혁신에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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