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공간이 사건의 의미를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수술실의 칼과 골목길의 칼”이라는 비유를 통해, 동일한 행위라도 그것이 일어난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함의를 가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은 도시 구조나 일상의 장면을 해석하는 데 신선한 통찰을 제공하며, 건축이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을 재조명하는 데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공간 중심적 시각을 복잡한 사회 문제에까지 그대로 확대 적용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국제정세, 역사적 갈등, 제도 개혁과 같은 사안은 단순히 ‘어디서’ 벌어졌는지가 아니라 ‘왜’ 벌어졌는지를 묻지 않으면 본질을 놓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유 교수의 공간 해석 틀이 세 가지 주제—국제정세, 반일·반중 정서, 주 52시간제—에 적용될 때 드러나는 한계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대학생들이 비판적 사고와 다층적 분석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먼저, 국제정세는 사건이 발생한 공간보다는 그 배경에 깔린 역사와 권력의 작동 원리가 핵심이다. 예컨대,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은 단지 ‘광주’라는 공간적 특성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당시 군사 정권의 억압, 시민들의 자발적 저항, 언론의 통제 등 다양한 정치·사회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였다. 또 다른 사례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단순히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 아니라, NATO 확장, 탈소비에트 정체성의 충돌,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야망 등이 맞물린 복합적 사건이다. 이런 사안은 ‘어디에서’가 아니라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통해 접근해야 이해될수 있다.
둘째, 반일 감정과 반중 감정은 비슷해 보이지만 뿌리와 맥락은 다르다. 반일 감정은 식민지배와 그로 인한 역사적 상처, 그리고 일본 정부의 반복적인 책임 회피와 역사 왜곡에서 비롯된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는 피해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채 정부 간 형식적 타협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한국 사회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반면, 반중 정서는 최근의 정치·문화적 갈등에서 비롯되며, 특히 ‘한한령’으로 대표되는 중국 정부의 한류 콘텐츠 차단,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왜곡 시도, 그리고 사드 배치 이후의 경제적 보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2022년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의 80%이상이 중국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 것은, 이 감정이 일시적이거나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님을 보여준다. 실제로 2021년에는 한 중 합작 드라마 <조선구마사>가 ‘역사 왜곡’ 논란으로 방영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는 반중 정서의 사회적 확산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처럼 두 정서는 감정의 강도나 공간적 거리감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과 현재의 정치적 행위에 기반하고 있다.
셋째, 주 52시간제에 대한 유 교수의 비판은 전통적인 ‘더 오래 일하면 더 잘 산다’는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현대 산업 사회의 구조를 반영하지 못하는 시각이다. 예를 들어, 독일은 연간 평균 근로시간이 약 1,356시간으로, 한국보다 30% 이상 짧지만 높은 생산성과 창의적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네덜란드 역시 유연근무제를 적극 활용해 일과 삶의 균형을 지키면서도 높은 고용률을 기록하고 있다. 반대로, 중국의 ‘996 근무제(주 6일, 오전 9시부터오후 9시까지 근무)’는 젊은 세대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다. 실제로 2021년 알리바바, 텐센트 등의 IT 기업 직원들이 ‘과로사’ 문제로 SNS에 문제를 제기하며 노동환경 개선 요구가
확산된 바 있다. 이런 사례들은 더 오래 일하는 것이 곧 경쟁력이라는 논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분석은 대학생들에게 중요한 사고 훈련의 기회를 제공한다. 첫째, 하나의 관점이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한다. 유 교수의 공간 중심적 사고는 일부 현상에는 통찰을 제공하지만, 그것이 모든 복잡한 사회 문제에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위험한 일반화다. 둘째, 사회 문제를 다룰 때는 다양한 요소를 함께 고려하는 다층적 사고가 필요하다. 사건의 본질은 단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 제도, 역사, 문화적 맥락 속에 숨어 있다. 이런 복합적 구조를 이해하는 능력은 대학생들이 현실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성찰적으로 사고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결론적으로, 유현준 교수의 공간적 해석은 도시와 일상을 이해하는 데는 신선한 접근일 수 있지만, 국제정치, 역사적 갈등, 제도적 문제처럼 복잡성이 높은 사안에까지 동일하게 적용되기엔 한계가 있다. 공간은 해석의 실마리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사건의 본질을 규명할 수는 없다. 우리가 사건을 이해할 때는 공간뿐 아니라 권력의 작동 방식, 역사적 누적, 사회 구조 등 다양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대학생들은 이러한 통합적 관점을 통해 단순한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더 깊이 있는 비판적 사고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