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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그 낭만에 대한 우리의 자세
  • 편집국
  • 등록 2017-09-04 14:43:09
  • 수정 2017-09-04 15: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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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최백호 님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가 있다. 한번 가사를 살펴보 기로 하자.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 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리 들어보렴”

 

 지금보다 예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그 정취에 음악은 정말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음악은 감각적으로 우리의 감정을 고양시키며 다가오게 된다. 어쩌면 음악이 우리 인간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담을 수 있는 하나의 형식이 된 것도 음악의 심리적 기능에 비추어 볼 때 무리는 아니다. 가사가 있는 노래라면 더할 나위 없이 감정의 직접적 표현은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음악을 평소 어떻게 듣고 있는가. 아마도 학교를 오가며 스마트폰으로 듣거나 집에서 컴퓨터를 켜고 듣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물론 필자도 마찬가지이다. LP판의 먼지를 닦아내며 턴테이블 바늘을 올려놓고 조용히 스피커 앞에서 감상을 하던 시절과 달리,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음악을 들으며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하고 있다. 말 그대로 순수한 감상행위는 많이 줄어들었다. 음악은 그 자체의 추상성과 비지시성 때문에 청자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음악도 언어처럼 소리로 전달되지만 이처럼 감상자의 몫을 남겨놓기에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예술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가치를 충분히 느끼려면 제대로 된 감상행위는 반 드시 수반돼야 한다.

 

 미국의 작곡가 코플랜드(Aaron Copland, 1900- 1990)는 음악을 듣는 방법을 세 가지로 분류한 바 있는데, “감각적 즐거움에 귀를 기울이는” 감각적 차원, “작품이 무엇을 표현하는가에 관한” 표현적 차원, 그리고 “음악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순음악적 차원이 그것이다. 앞서 언급한 음악을 듣는 우리의 모습은 감각적 차원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럼 과연 우리의 모습에서 나머지 두 차원은 발견될 수 있을까? 노래의 경우 표현적 차원에서 단순히 가사의 정보에 기대기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한편, 전공생이라면 순음악적 차원에서 분석적으로 들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반인은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노력을 요한다. 이러한 얘기가 현학적으로 들릴지는 몰라도, 우선 우리는 음악을 감상하는 대상으로서 제위치시켜야 한다. 음악은 무언가를 하면서 허전함을 달래는 도구가 아니다.

 

 필자는 13년 전, 일간지에서 음악산업 구조 변화에 대한 대비를 주문한 적이 있다. 산업은 빠르게 변화해 갔고, 소비자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직 일차적 감상에 머물러 있다. 감상 방법의 한 가지로서, 필자는 연주자의 생생한 모습을 실제 공연이든, 영상물을 통한 재생의 형태이든지 간에 시각적으로 보고 느끼길 제안한다. 음악학자 콘(Edward T. Cone, 1917- 2004)의 표현처럼, 연주자는 음악을 통해 상징화된 작곡가의 페르소나(persona)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말한 “음악의 속도와 흐름에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를 맞춰 음악의 활기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제는 우리가 감상의 ‘낭만’을 다시 찾아야 할 때이다.

 

박병규 교수

전자디지털음악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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