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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間偉人(월간위인)] 미완의 개혁가 김옥균
  • 조승화
  • 등록 2021-03-29 09: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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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일천하로 끝난 그가 꿈꾼 개화된 조선
두 세기 전 어제인 1894년 3월 28일, 근대화된 조선을 만들고자 했던 젊은 개화파가 조국에 의해 암살당했다. 사망한 후에는 능지처참을 당하고 조선이 명맥을 유지하던 시기에는 역적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진 뒤 시간이 흐르며 어느 정도 재평가가 이뤄졌다. 본지에서는 미완의 개혁가이자 갑신정변의 설계자인 김옥균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망해가는 국가의 젊은 개혁가


 김옥균은 1851년 충청남도 공주의 안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나 숙부인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갔 다. 당시 세도정치를 통해 조선을 지배하던 안동 김씨 가문 자제 답게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 덕에 학업에 매진했던 김옥균은 22살이라 는 젊은 나이에 과거에서 장원급 제해 △사헌부 감찰 △정언 △홍문관 교리 등의 관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더불어 연암 박지 원의 손자인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접했고 훗날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하는 박영효, 서재필과 친구가 돼 조선의 장래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이 무렵 조선은 망국을 향한 발걸음이 시작된 상태였다.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세도정치의 폐단이 국가를 갉아먹었고 흥선 대원군의 개혁마저 국가의 쇠퇴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 게다가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의 개항 요구와 압박이 거세지고 있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운명이었다. 결국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강제 개항 당했음에도 지배층은 위정척사론을 내세우며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개화에 대한 요구를 부정했다. 이 과정을 지켜본 김옥균은 조선을 자주독립과 근대화가 실현된 국가로 바꾸기를 결심한 것이다.


갑신정변과 삼일천하


 이에 따라 김옥균은 △김홍집 △박영효 △유길준 등을 해외 로 보내는 등 개화파 형성에 힘썼고 수신사 자격 등으로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해 신문물을 직접 접했다. 그 영향으로 김옥균은 고종의 지지를 얻어 일본을 모델로 한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해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고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과 차관 교섭 등을 시도했다. 하지만 집권세력이었던 민씨 정권과 수구파가 김옥균의 급진적인 개혁에 반대하면서 개화파는 온건세력과 급진세력으로 분열해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갈등 끝에 급진 개화파가 계획했던 개혁은 좌절당했고 신변의 위협까지 가해졌다. 이에 급진 개화파는 1884년 12월 4일에 열린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일본의 도움을 받아 정변을 일으킨다. 정변의 결과, 김옥균과 급진 개화파는 조정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이튿날 김옥균은 △신분제 폐지 △규장각 폐지 △조세 제도 개혁 등을 담은 개혁안 정강 14조와 자신들이 요직을 차지한 새로운 인사를 발표했다. 그러나 개혁안을 공포하기도 전 왕후 민씨의 요청으로 출병한 청나라 군대가 창덕궁을 점령하면서 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고 김옥균 역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됐다.


개혁가의 최후와 그의 유산


 이후 김옥균은 일본 정부에 의해 유배를 보내졌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10년 동안 한량처럼 시간을 보낸다.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박영효가 욕을 퍼부을 정도로 크게 실망해 그와 연을 정리할 정도로 완전히 변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선의 근대화를 포기하지 않은 채, 고종에게 편지를 써 개혁을 강조하거나 윤치호 등과 청나라로 넘어가 이홍장과 접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홍장과 만나기 하루 전인 1894년 3월 28일 상하이에서 자객 홍정우에게 암살당하며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절명했다. 이후 그의 시신은 조선으로 송환돼 양화진 백사장에서 능지처참에 처해져 효수당했다.


 이렇듯 김옥균은 조선 왕조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역적 그 자 체였다. 그러나 광복을 맞이한 후, 조선의 근현대사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재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그가 발표한 정강 14조 중 일부가 후일 이뤄진 갑오개혁 등에 반영됐고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기고자 했다는 점 등이 알려지면서 개혁가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수단과 과정이 잘못됐고 이로 인해 개혁에 제동이 걸렸다는 등의 한계도 지적되지만, 김옥균은 과거처럼 극악무도한 역적이 아닌 실패한 개혁가로서 우리에게 받아들 여지게 됐다. 


조승화 기자│tmdghk0301@kg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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