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나.작.소] 2018학년도 올해의 서평 수상작
  • 김희연
  • 등록 2019-03-04 09:15:47
기사수정
본교 중앙도서관에서는 비교과프로그램으로 서평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서평은 도서관 홈페이지를 통해 언제나 응모가 가능하고 월 단위로 끊어서 시상하고 있다. 그렇게 응모된 서평 작품들 중에서 ‘2018학년도 올해의 서평’에 선발된 작품이다. 본지에서는 1위와 2위의 서평을 두 호에 걸쳐 소개하도록 하겠다.

 

오만과 편견

 

추민경(경영·4)

 

 ‘사랑’, 그것은 참으로 달콤하나 동시에 낯설다. 우리는 ‘혐오’가 더 익숙한 시대에 살기에. 사랑 그 반대편에 혐오 말고 또 무엇이 놓일까. 결혼은 어떤가. 감정의 극단에 사랑이 있다면 이성의 극단에 결혼이 놓일 수 있겠다. 호르몬의 장난으로 3개월이면 사라진다는 사랑보다 물질적 안정감이 주는 행복으로 결혼을 채우려는 오늘의 모습이 300년 전 이 소설과 닮아있다. 결혼정보회사의 알선으로 서로 적당히 맞는 상대를 찾아 사랑하려는 현대인에게 소설은 사랑의 완성으로써의 결혼이라는 낭만적 희망을 안겨준다. 그것 말고는 없을까. 이 소설을 그저 로맨스 소설로 치부하기에는 출간당시 시대배경이 걸린다. 시대를 고려한다면 이는 문제적인 소설이다. 속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신사숙녀의 나라 영국에서, 그것도 18세기에 여성인물이 상대를 재고 따지는 사랑과 결혼의 불편한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결혼이 오직 사랑의 시작점으로 존재하던 시대에 사랑의 완성으로 결혼을 상정하는 것도 유의미하다.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혐오와 상업적 결혼이 난무하는 이 시대는 진실한 사랑을 하자고 그렇게들 외쳐댄다. 소설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라는 두 남녀의 관계를 통해 질문의 답을 향해 나아간다. 이 소설이 고전인 이유는 거기에 있다.

 

 오만이라고 번역된 pride는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자부심, 자존심, 자만심. 소설에서는 이 세 단어가 혼용된다. 하지만, 엄연히 다른 의미이니 보다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사랑의 시작은 자부심부터다. 소설의 두 남녀 주인공은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을 살아온 이만이 자신의 결정에 확신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이런’ 내가 선택한 상대라면 믿고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자부심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이어진다.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했던 콜린스는 자신의 후원자인 캐서린 영부인에 대한 자랑만을 일삼을 뿐 타인과의 대화에서 자신과 상대는 없다. 그의 사랑에는 캐서린 드 버그 영부인이 귀신처럼 따라다닌다. 그래서 그는 사랑할 수 없는 남자가 된다. 엘리자베스가 콜린스의 청혼을 거절하자마자, 콜린스와 결혼하는 엘리자벳의 친구 샬롯은 결혼에서 행복은 순전히 운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그와 함께 있으면 지루했고. 그녀에 대한 그의 애정도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어찌됐든 그녀는 남편을 갖게 될 것이었다. 남자나 혼인 관계 그 자체를 중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은 언제나 그녀의 목표였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 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

 

 목표는 결혼, 그리고 그 수단으로 콜린스를 택하다니. 칸트가 들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어쨌든 참 둘은 잘 어울린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을 우리는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사랑에는 자부심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생의 지평을 상징하는 책을 즐기는 엘리자벳과 다아시가 주인공으로 채택되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자부심만 있으면 될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자부심을 가진 두 성인에게는 겨우 사랑의 시작단계를 밟을 자격이 주어질 뿐이다.

 

 자기 자신에게 pride를 지닌 개인은 가치관과 주관이 뚜렷하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나 부딪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자부심을 가진 두 개인의 자존심 싸움이 시작된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린 다아시를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다아시는 엘리자베스를 좋아하지만 그녀는 본심을 말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삐뚤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 여긴다. 두 사람은 각자 고유한 가치와 언어를 지니기에 두드러지는 상대방을 인정함과 동시에 무시할 수 없어 서로가 거슬린다. 다른 두 세계가 충돌하며 자신의 세계 속에 잠재된 편견이 거부감으로 발동된다. pride가 높을수록 prejudice도 비례한다. 자신의 세계가 명확하기에 다른 것에 대한 선입견도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서브 남주와 여주 격인 제인과 빙리의 관계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것과 대비된다. 제인과 빙리는 서로를 자신의 편견으로 보지 않는 대신 타인의 편견으로 곡해한다. 그들은 아이처럼 순수한 시각으로 판단하지만 동시에 가족 혹은 친구의 편견 개입 역시 잦다. 그리고 이는 관계의 위기로 이어진다. 사랑을 할 때 경계해야 하는 것은 우리 안의 편견 뿐 아니라 가까운 이의 편견도 해당된다. 사랑이 두 사람만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더 많은 편견의 개입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두 사람은 정말 지겹게 엇갈린다. 다른 이성에게 관심을 가졌다가, 서로 머무는 장소를 이동해 멀어졌다가, 우연한 계기로 오해를 풀었다 싶으면 다시금 또 다른 문제로 서로를 미워한다. 반복되는 편견과 자존심의 줄다리기 속에서 아주 서서히 오랜시간 서로를 두고 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상대의 말과 행동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된다. 소설의 긴 갈등묘사와 달리 각색된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다아시의 편지 한 장으로 모든 편견과 오해가 풀리는 것처럼 표현된다. 이는 어색함을 자아내지만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이해할 수 있다. ‘그래 이쯤 되면 오해를 풀 때도 됐지.’ 둘은 서서히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양보한다. 그 시작점은 바로 청혼 다음날의 다아시 편지다. 이 편지는 위컴과 다아시의 차이점을 보여주
는 상징이기도 하다. 둘의 차이는 ‘기다림’에 있기 때문이다.

 

 편지는 기다림이 반드시 수반되는 매체다. 편지를 쓰는 순간도 그것이 전달되어 상대에게 읽히고 다시 답이 올 때까지, 면대면의 대화와 다르게 모든 것들이 천천히 진행되며 서로에게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부여한다. 모든 이의 호감을 사는 위컴은 엘리자벳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아시의 험담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는 엘리자베스의 호감이 사랑으로 바뀌기도 전에 다른 여자와 교제를 시작했다는 소문이 돈다. 시간과 비례해 관계가 깊어진다는 진리를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과는 깊은 관계를 맺기 쉽지 않다. 반대로 다아시는 어떤가. 누구나 오랜 시간동안 생겨난 자신의 모함을 알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 그리고 어떻게 해명할 지를 생각하기 위해 말이 아닌 편지로 마음을 전한다. 소설은 그가 평소에도 여동생에게 편지로 안부를 묻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따라서 편지는 환심을 사기 위한 일시적인 행동이 아닌 그의 성품임을 알 수 있다. 신중함, 참을성, 답을 기다리는 동안 상대를 생각하며 시간과 감정을 쏟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임을 확인 시켜준다. 우리가 사랑할 때를 떠
올리면 된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한 글자 한 글자 글을 쓰는 자신을. 엘리자베스의 오해가 풀릴 때까지,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사랑할 준비가 될 때까지 그는 편지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그저 기다린다.

 

 사랑은 동시에 시작되는 일이 거의 드물다. 대게 한 사람의 물음과 그의 질문에 답변을 요구받는 한 사람의 관계로 시작된다. 두 사람이 관계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아닌 오랜 시간을 두고 알아가며 맺는 것임을 이들의 관계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위컴의 많은 장점이 단점이 되고, 다아시의 많은 단점들이 장점으로 바뀌는 그 기다림의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편협한 관점과 어리석음, 편견들을 자각하며 반성하게 된다. 그렇게 그녀는 다아시에 대한 편견을 허물고 그를 사랑할 준비를 갖춘다.

 

 “그런데 그 ‘열렬하게 사랑한다’는 표현은 너무나 진부하고 의심스럽고 막연해서 감이 잘 안 잡혀. 진정으로 탄탄한 애정만이 아니라 단반시간 동안의 만남에서 생겨난 감정에도 종종 그런 표현을 쓰곤 하니까 말이야.”


 소설의 초반부 엘리자베스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사랑은 굉장히 사치스러운 것이다. 감정, 시간, 돈 그리고 많은 것들을 소모시킨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열망한다. 상대에 대한 가벼운 감정에서 시작된 애정 혹은 흥미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에 잠재된 편견과 자존심(pride)마저 내려놓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가능성 정도는 던져줘야 진실한 혹은 열렬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음을 우리는 600페이지를 참아내며 깨닫게 된다.

 

 그래, 그쯤 돼야 사랑이지.

TAG
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