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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의 판단이 바뀐 ‘양심적 병역거부’
  • 박현일
  • 등록 2018-11-19 10: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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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무죄 판결·대체복무제 논의 등 변화
징병제를 실시하는 대한민국에서 병역거부는 위법이다. 과거 종교 및 신념을 이유로 군복무를 거부해 재판이 열린 사례는 있어왔지만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은 한 건도 없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지난 1일 뒤바뀌었다.

 

 

대한민국에서만 논란 큰 병역거부


 병역거부는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징병제 국가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다. 대한민국에서는 헌법 제 19조에 명시된 ‘양심의 자유’에 따라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것을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말한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이유는 종교 또는 개인의 신념이다. 지금까지 병역거부로 인해 수감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특정 종교의 신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해당 종교의 교리를 병역거부 근거로 들었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거의 대한민국에서만 진행됐다. 징병제를 채택하는 국가가 다수가 아닌데다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수행해야 하는 국가들도 병역 거부자들을 대상으로 한 대체복무를 법제화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대만 △핀란드 등 20여개국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를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대체복무제를 채택하지 않았고, 병역거부자들은 징역이나 벌금 등의 형을 받아왔다. 지난 2013년 전 세계에서 군복무 거부 로 인해 수감된 사람들은 총 723명이었는데, 이 중 한국인은 669명 으로 92%를 차지했다. 따라서 현재 한국은 병역거부에 대한 가장 큰 논란 속에 있다.

 

14년 만에 뒤집힌 판결


 이렇듯 내내 이어져왔던 상황을 완전히 뒤집는 판례가 생겼다. 지난 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이하 전원합의체)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해당 판결에서 13명의 대법관 중 9명이 무죄 의견을 냈다. 개인의 믿음과 국가에 대한 의무가 충돌한다 해도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법적 판단이 세워진 것이다. 이에 따라 종교를 이유로 한 양심적 병역거부 최초의 무죄 판결이 확정됐다. 지난 2004년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던 전원합의체가 14년 만에 판단을 바꾼 것이다. 다만 병역거부가 무죄라고 해도 의무는 남기 때문에 무죄판결을 받은 병역거부자는 대체복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전원합의체는 어떤 기준을 통해 무죄라는 결론을 내린 것일까. 지난 1일 판결에서 대법원은 양심의 판단 기준을 정했다. 절박하고 구체적인 양심은 그 신념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해야 하고, 삶의 일부가 아닌 전부가 그 신념의 영향력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을 할 근거로는 △가정환경 △사회경험 △성장과정 △학교생활과 같은 양심과 관련된 간접 또는 정황이 드러나는 사실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이 만만치 않다. 판결 당시 반대 의견을 낸 4명의 대법관은 진정한 양심의 존재 여부를 심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표했다. 주관적인 사정과 판단 기준으로 병역 거부의 정당성을 판단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대체복무제, 징벌적 성격과 형평성 사이


 양심적 병역거부가 정당한 병역거부의 사유로 인정된 상황에서 병역거부자들이 군복무 대신 수행할 대체복무에 대한 논의도 이뤄지고 있다. 지난 6월 헌법재판소는 대체복무제가 규정되지 않은 병역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국방부 △법무부 △병무청은 대체복무 실무추진단을 꾸려 논의를 진행 중이고, 이달 말 대체복무제 정부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복무기간 27개월이라는 다른 안도 있지만, 해당 방안에는 △복무기간 36개월 △교정시설(구치소)에서 합숙 복무 △국방부 산하 심사기구 설치 등이 포함될 것이 유력하다.

 

 하지만 대체복무제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 군인권센터·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대체복무제의 복무 기간이 현역 복무기간의 2배인 36개월로 선정될 경우 국제사회의 인권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전 세계적으로 가장 길다는 사실을 제시하며 정부안에 난색을 표했다. 대체복무제를 도입한 11개국 중 8개국 의 복무 기간은 현역병의 1.5배 이하인 것을 고려할 때, 2배는 징벌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국방부는 복무기간 선정에 대해 대체복무의 병역기피 이용 방지를 위한 엄정한 시행 방안 마련 및 병역의무 형평성의 유지라는 원칙을 제시했다. 따라서 발표될 정부안은 해당 원칙의 영향으로 제도를 악용하는 상황을 막고 현역병 및 △공·해군 △의무경찰·소방 △사회복무요원 등의 병역 이행자와 대체복무자 간의 형평성을 지키는 방향으로 기간을 설정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숱한 논란에도 유죄판결을 유지했던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법적 판단이 바뀜에 따라 파장이 커지고 있다. 최근에는 종교가 아닌 ‘징병제는 위헌’이라는 개인의 신념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에 대한 재판도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에만 남아있던 병역거부 논란은 이번 상황을 계기로 끝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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