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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추풍낙엽 속 안빈낙도해도 난 좋아
  • 이수민 기자
  • 등록 2022-11-14 10: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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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서, 러스틱 라이프
차갑고 냉담한 도시의 가을을 견디기 어려운 당신. 지금 당장 떠나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당신. 오늘은 기차표를 끊고 시골로 떠나보자. 삶은 달걀과 사이다가 주는 분위기와 분명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무지개색으로 물든 올가을, 본지는 새롭게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러스틱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알아봤다.

2020 F/W 라이프 스타일 트렌드, 러스틱 라이프


 러스틱 라이프는 시골풍을 뜻하는 러스틱(Rustic)과 삶을 뜻하는 라이프(Life)의 합성어다. 이는 날 것의 자연과 시골 고유의 매력을 즐기며 도시 생활의 여유와 편안함을 부여하는 시골을 지향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라고 정의되며 서울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 선정한 트렌드 코리아 2022로 꼽히기도 했다.


 진정한 러스틱 라이프에 이르기 위해서는 4가지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이에는 △1단계 '그냥 떠나기' △2단계 '잠시 머무르기' △3단계 '자리잡기' △4단계 '둥지 틀기'가 있다.


러스틱 라이프 입문자용: 그냥 떠나기


 1단계 '그냥 떠나기'는 곧 죽어도 대도시파인 모던 현대인들도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러스틱 라이프다. 제아무리 시골 체질이 아니더라도 바다가 보이는 통창을 가진 멋진 카페를 방문해본 경험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외곽지역에 위치한 카페를 찾아가 보는 경험은 러스틱 라이프 입문자들에게 제격이다. 최근에는 물멍, 불멍을 넘어 드넓은 논밭을 구경하는 논멍, 밭멍도 대세를 이루며 유명 관광지나 사람이 붐비는 명소보다는 혼자 조용히 자연을 즐기기 위해 숨은 명소를 찾는 추세다.


 기자는 입추를 맞아 지난 8월 27일, 가족들과 함께 전라남도 함평을 방문해 '아는 사람만 안다'는 한옥 카페 녹유원을 방문했다. 그곳은 여느 카페들처럼 엄청난 뷰를 자랑하지도, 멋들어진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 같지도 않았지만 조용히 흐르는 카페 앞 시냇물과 한적한 분위기가 서울에서 먼 거리를 달려온 기자와 가족들의 마음을 사르르 녹이는 것만 같았다. 특히, 입식과 좌식이 자유로워서 저녁 6시 경에는 한옥 창틀 가까이 위치한 온돌 마룻바닥에서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다.


 녹유원이 여느 카페와 달랐던 점은 디저트마저도 한식 디저트로 판매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티라미수나 타르트 대신 처마 지붕 아래서 맛보는 한과 세트와 가래떡구이는 마치 조선 시대 속으로 빨려 들어온 듯한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녹유원 사장님은 "비록 작은 마을의 동네 카페일지라도, 멀리서부터 오신 관광객들이 함평에 와서 잊고 있던 마음 속 평화를 되찾은 것 같다고 말씀해주실 때마다 녹유원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되곤 한다"고 전했다.

카페 '녹유원'가래떡 구이 세트

러스틱 라이프 초심자용: 잠시 머무르기


 다음 2단계 '잠시 머무르기'의 사례는 다름 아닌 '한 달 살기'다. 팬데믹 이전에는 해외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팬데믹 이후에는 국내의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곳에서 한 달 살기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구례 △통영 △순천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일부 지자체는 러스틱 라이프 트렌드에 따라 직접 한달살이 지원 사업을 펼치며 지역 홍보를 도모하고 있으니 한 달 살기를 꿈꾸고 있는 학생들이라면 미리 알아보고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러스틱 라이프 숙련자용: 자리 잡기


 2단계까지는 러스틱 라이프의 맛보기 단계였다면 3단계부터는 진짜 러스틱 라이프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단계다. 3단계 '자리 잡기'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듀얼 라이프가 있다. 듀얼 라이프는 말 그대로 주말 농촌 체험, 농촌 숙박 등을 하면서 도시와 시골을 넘나드는 이중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기자가 방문했던 함평에서도 이러한 듀얼 라이프 체험객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함평 주포 한옥마을은 한옥 스테이 집성촌으로 모든 숙박 시설이 한옥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장소였다. 주포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주포방조제가 건설되며 서해에서 잡은 어물의 집산지로 알려져 과거 주항포로 불렸지만 폐항 위기에 처하게 된 1955년 이후 돌머리 해수욕장과 각종 횟집이 들어서며 현재의 활기찬 포구의 모습을 되찾았다.


 주포 한옥마을에서 보이는 돌머리 해수욕장의 모습과 함평만 낙조 풍경은 가히 절경이다. 또한 한옥마을 입구에서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보이는 팔각정자 주변, 국화와 핑크뮬리 등 100여 종의 꽃이 심어진 산책로는 한 폭의 그림 같아 관광객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이 밖에도 매달 2일부터 5일 간격으로 열리는 함평 오일장이나 자연 해수 찜질을 즐겨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가 될 수 있다.


주포 한옥마을한옥 스테이돌머리 해수욕장

러스틱 라이프 전문가용: 둥지 틀기


 펜데믹 이후 재택근무나 원격근무가 확대됨에 따라 도심에서 거주할 필요성이 축소되고 러스틱 라이프를 추구하는 동향이 강해져 직접 시골살이를 결정하는 경우가 여럿 발생했는데 이것이 곧 4단계 '둥지 틀기'다. 이들은 시골에 오래된 집을 리모델링해 거주하거나 별장을 건설해 오랜 시간 시골에 머물기를 택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9년 대비 2020년에는 2만 8,000명이나 증가한 전체 4만 4,000명이 농촌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추산돼 러스틱 라이프의 파급력을 반증했다.


디저트 속에 숨어든 시골의 정취


 러스틱 라이프가 가져온 파급력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실제 시골에 내려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삶 속에서 러스틱한 마케팅 상품을 자주 접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요즘 한식 밀키트와 한식 디저트가 유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기자는 취재를 위해 직접 인사동에 위치한 한식 디저트 카페를 방문해봤다. 이곳에서는 한글 일러스트가 랜덤으로 새겨진 한글 빵과 3가지 떡식을 맛볼 수 있었다. 한식 디저트를 처음 맛본 대학생 조 모 양은 "플레이팅이 현대식이라 거부감이 없었고 한식에 주로 사용되곤 하는 자연 재료를 가루로 만들어 뿌리니 한식 디저트가 익숙하지 않은 청년 세대들도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서양식 디저트는 과하게 단 경우가 많았는데 그에 비해 한식 디저트는 건강한 맛과 개성이 돋보여 앞으로도 종종 먹게 될 것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한글빵과 3가지 떡식

흔한 호캉스? 올해는 옥캉스!


 숙박 트렌드 역시 함께 변화했다. '호캉스'에 이어 시골과 바캉스를 합친 '촌캉스', 한옥과 바캉스를 합친 '옥캉스'와 같은 신조어의 탄생이 바로 이런 것이다. 공유 숙박 플랫폼 '에어비앤비'에서도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고택의 예약률이 높게 나타나며 많은 사람들이 시골식 생활에 흥미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삼시세끼 △도시 어부 △효리네 민박과 같이 시골 감성을 자극하는 힐링 프로그램들은 꾸준히 사랑받아왔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귀농 살이, 한달살이와 같은 유튜브 콘텐츠들이 증가하며 여전히 많은 시청자에게 포근한 시골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자가 가까이서 만나본 함평은 러스틱 라이프의 정수와도 같은 곳이었다. 모두가 여유를 가지고 각자의 농작물을 기르고 계절을 온전히 즐기는 모습은 기자에게 쉼의 미학에 대해 일깨워줬다.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며 삶의 목적을 잠시 잃었다면, 무작정 시골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그곳에서 잠시 머물며 깊은 숨을 내쉬어 본다면 대지는 머잖아 당신의 삶을 꽃 피우는 방법을 자연 속에서 보여줄 것이다.


글·사진 이수민 기자 ㅣ leesoomin22@kyongg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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