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우리 말글을 사랑하는 방법?
  • 편집국
  • 등록 2022-05-30 08:32:36
기사수정

도재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국어 사랑 나라 사랑이라는 표어(標語)를 다들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면면이 이어져 온 우리 말글을 지키기 위한 숭고한 노력들, 이를테면 조선어학회의 한글강습회 운영이나 언론사의 문자 보급 운동 등 비문해 퇴치 운동의 뜻을 받들고, 우리의 정체성과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믿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모종의 전체주의 또는 집단주의적 향취가 풍기는 위의 구호는 오늘날 흔히 접하기는 어려운 것이 되었지만, 우리 말글의 순수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선언은 시시때때로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어 온 국어(한글) 운동의 역사와 당위성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언어에는 민족마다의 고유한 정신과 영혼이 담겨 있다고 하는 공동체에 대한 관념은 상당히 공고한 편이다. 이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런 생각도 필요하며 유용한 면이 물론 있다. 특히 우리 말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서적 결속에 이만큼 일상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수단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한편으로 언어 사용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인정하고 보장하기보다는, 오염, 파괴, 훼손을 염려하는 가운데 임의적 검열과 배제를 당연시하는 태도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2000년대 초반 디시인사이드에서 유행했던 폐인 문화와 ‘아햏햏’과 같은 표현을 두고 국어 파괴를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010년대 중반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한 야민정음도 마찬가지다. 젊은 세대에서 생산적으로 이루어지는 줄임말의 사용이나, 나아가 보그체, 급식체 등으로 일컬어지는 제법 정형화된 문체가 의사소통에 지장을 준다는 지적도 해묵은 것이 되었다. 여러 방식의 변용이 특히 기성세대에게는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겠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수다한 언어사용역(레지스터)에서 늘상 벌어지는 창조적 언어 사용의 한 양상일 뿐이다. 


 우리 말글은 아름답다고들 한다. 그런데, 지구상 존재하는 6000여 개의 언어 중 하나인 한국어가, 유니코드에 등록된 150여 개의 문자 체계 중 하나인 한글이 도대체 왜 아름다운 것일까? 평음-격음-경음의 삼지적 상관속이 범언어적으로는 매우 드문 것이어서? 기본적으로는 SOV 어순이지만 꽤 자유로운 변이가 가능해서? 의성어 의태어가 다양해서? “한꾹인뜰만알아뽈쑤있께짝썽하껬씁니따.”와 같은 표기로 구글 번역기를 피해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서? 전 세계 모든 언어의 음성을 표기할 수 있는 유일한 문자 체계여서? 사실 그 어느 것도 아름다운 이유는 아니다.


 삼지적 상관속은 음운 체계상의 특징이고, 어순 변이는 통사적 특징이며, 의성어 의태어는 어휘적 특징일 뿐이다. 번역기를 피하는 정보공유는 재미있지만 아름다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고, 전 세계 모든 언어의 음성을 한글로 표기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한국어의 고유성과 한글의 독창성을 얼마든지 강조할 수 있지만 미추(美醜)의 판단을 개입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개별 언어의 몇몇 특징을 두고 아름답다고 하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을 언어는 없다. 또한 문자의 창조적 활용은 그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 말글을 사랑하기 위해서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역설하는 것, 실은 허상을 두고서 섀도복싱을 너무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규범의 파괴를 일삼는 젊은 세대에 대한 개탄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공허하다. 해마다 한글날을 즈음해서 있는 줄도 몰랐던 순우리말을 새삼스레 꺼내어 쓰는 일은 낯설고 어색하다. 외국어와 알파벳의 남용을 경계해야 하겠지만 애당초에 왜 남용하는 지경이 되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순수에의 동경은 애틋하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도외시하는 것일 수 있다. 꼭 순수하고 아름답다고 믿어야만 보존할 가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영어 철자를 틀리는 것은 부끄러워하면서 한글맞춤법을 틀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중적 태도를 경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외국어와 다른 문자에 사대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외국어를 잘하는 것만큼 한국어를 잘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DB, NH, SSG 등의 알파벳 두문자어를 글로벌화의 결과로 당연시하는 것만큼, 경기도의 대표상징물 ‘ㄱㄱㄷ’나 LX그룹의 ‘ㅅㄱ’(세계), ‘ㅈㄱ’(지구) 등 초성 광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면서 이러한 한글 활용의 심미성을 이해하고 초성 퀴즈를 푸는 재미를 알 필요도 있을 것이다. 

TAG
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