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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History] 나치에 종전을 고한 히틀러의 오판
  • 박준하 수습기자
  • 등록 2022-05-09 09:25:01
  • 수정 2022-05-09 09:2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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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945년 4월 16일부터 시작된 베를린 공방전이 소련군의 승리로 끝나며 히틀러와 나치가 패망한 날이다. 본지는 극우 파시즘으로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나치가 몰락하는 과정을 되돌아보고자 베를린 공방전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다.


전쟁 후반부 패전의 조짐

 나치는 1919년에 창당돼 반유대주의, 우생학 등 극단적 인종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나치즘을 이념으로 내세웠던 독일 정당이다. 나치가 이끄는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지만, 전쟁 후반 무렵인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소련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서부·동부 전선이 완전히 붕괴돼 패배의 그림자가 짙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만슈타인의 활약으로 동부에서의 전세를 역전시키고 상실한 영토를 회복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히틀러는 모든 병력을 총동원해 서부 전선에서의 우세를 점하면 다시 판세를 뒤엎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결국 동부전선의 방어를 포기한 채 서부 전선에 총력을 거는 도박을 선택한다. 그러나 히틀러의 판단과 달리 독일군은 서부·동부 전선에서 모두 참패했고 서방 연합의 요청에 따라 소련군은 수도 베를린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베를린 공방전 시작과 독일의 열세

 1945년 4월, 소련은 약 250만 명에 달하는 3개의 전선군을 베를린 주위로 진군시킨다. 당시 베를린의 독일군 수비대는 약 70만 명에 불과했는데, 히틀러는 양적‧질적으로 떨어지는 군사력을 보강하고자 서부 전선에 남아있던 제12군에 베를린 회군을 명령한다. 하지만 서부에서 제12군을 이끌던 벵크는 미군이 공격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면서 독일군의 베를린 결집은 히틀러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한편 독일을 남북으로 분단시키는 데 성공한 미군과 소련군은 계속해서 베를린으로 진격했다. 이때 전선 중앙에서 주코프가 이끄는 소련군은 젤로 고지로 후퇴한 하인리치가 이끄는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전략적으로 지형을 활용한 하인리치의 독일군에게 3배가 넘는 사상자를 내며 패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력이 심각할 정도로 열세였던 하인리치의 부대는 연이은 3일간의 전투 끝에 젤로 고지를 상실하면서 소련군은 베를린으로 거침없이 진군했다.


베를린 함락, 그리고 나치의 몰락과 유럽 전선의 해체

 젤로 고지를 돌파한 소련군은 곧바로 베를린 전역을 포격하기 시작했지만, 독일의 쇠르너는 선제공격을 통해 어느 정도 방어에 성공했다. 이를 본 히틀러는 광범위한 선제공격과 더불어 슈타이너에게 소련군의 진격을 막을 것을 명령하지만, 이미 병력이 바닥나기 시작했기에 둘 다 실현되지 않았다. 게다가 나치의 핵심인사 중 한 명이었던 힘러는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한 채 항복 협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소련군에게 겹겹이 포위된 상황에서 최후의 방어선인 티어가르텐 마저 함락될 위기에 직면한 히틀러는 자살을 선택했다. 이후 제국 의사당 내부의 군인들마저 전멸하자 나치 독일이 공식적으로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은 수많은 상처를 남긴 채 종결됐다. 그리고 이로써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 독일의 피로 얼룩진 역사 역시 마침표를 찍었다. 그 후 연합군은 수많은 전범자들을 대상으로 전범재판을 진행했고 독일을 동서로 분단시키면서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을 잊지 않고 단죄했다.


박준하 수습기자 | parkjunha3321@kyongg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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