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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History] 0.02%의 기적, 인천상륙작전
  • 서지수 기자
  • 등록 2021-09-14 0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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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과 아군 모두 실패를 예상한 도박

낙동강 전선 위기의 한국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남침하면서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기습공격을 통해 북한군은 무 방비상태의 서울을 점령하며 한강을 넘어 계속 남진했다. 결국 유엔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야 하는 위기에 이르렀다. 이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의 진격에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미함동참모본부에서는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하기에 부적절한 인천의 조건을 이유로 상륙 작전을 반대했다. 상륙작전이 계획된 9월의 인천은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로 인해 15일부터 단 3일간만 작전이 가능했다. 15일마저도 밀물이 차는 아침과 저녁 각각 3시간 안에 작전을 완료해야 했다. 또한 협소한 인천항 때문에 해상 접근로가 제한돼 아침에 월미도와 저녁에 인천을 모두 점령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해안 벽을 통해 상륙하더라도 시가지에서 적과 교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인천상륙작전, 위기를 기회로


그럼에도 맥아더는 6월 29일 서울 함락 후,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며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해 비밀리에 작전을 추진했다. 이에 그는 적과 아군 모두 어렵다고 생각하는 전략적 기습효과를 노리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인천상륙작전은 3단계로 이뤄졌다. △1단계는 월미도 점령 △2단계는 인천 점령 △3단계는 서울 수복이었다. 마침내 진행된 작전의 결과, 9월 15일 오전 6시 한미 해병대가 월미도에 상륙해 작전 개시 2시간 만에 인천을 점령했다. 이어서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미국 제1해병사단도 인천을 점령했다. 19일에는 한국 해병 2개 대대와 미국 제1해병사단이 한강을 건너 서울을 공격했고, 마침내 28일 서울을 수복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연합군은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동시에 낙동강 전선의 국군과 유엔군도 총반격에 나서면서 북한군을 앞뒤로 공격했다. 이 기세를 몰아 38도선 남쪽 지역의 대부분을 되찾으며 북진했다. 비록 중공군의 개입으로 통일에는 실패했지만, 바람 앞의 촛불 같던 대한민국을 구해낸 신의 한 수였다.

▲ 출처: 인천상륙작전기념관 홈페이지


인천상륙작전을 기억하는 방법


정부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을 기리기 위해 1984년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설립했고 2003년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기념관은 인천 지하철 1호선 동막역에서 버스를 이용해 송도 유원지 하차 후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과 △신정 △설날 △추석 당일이다. △신정 △설날 △추석을 제외한 공휴일은 개관하고, 공휴일 다음날은 휴관한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오후 5시 30분부터 입장 마감하니 참고 바란다. 공휴일기념관 내에는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는 각종 역사적 자료가 전시돼 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회상하며 인천상륙 작전 기념관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서지수 기자 seojisu0120@kgu.ac.kr

한국전쟁 초기 한국은 낙동강 전선까지 몰리며 위기를 맞았다. 이에 연합군은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을 결정했으나 인천은 대규모 상륙작전을 수행하기에 부적절한 조건을 가지고 있어 모두가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9월 15일 연합군은 작전에 성공하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에 본지는 한국전쟁에서 결정적인 순간 중 하나인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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