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호모 스튜던트
  • 편집국
  • 등록 2021-04-13 16:17:46
기사수정

    




 

  인간은 자연을 소유하는 자가 아니라 해석하는 존재다. 누구나 자신의 인식으로부터 세계를 바라보며 보이는 만큼 그것을 담아내려고 한다. 이러한 해석은 이미 있는 세계에 대한 지각 작용으로서 그것이 이것 일 수 있도록 규정하고 나름대로의 고유성을 가지게 하는데 있는 것. 그렇지만 인간 자체가 불안하고 불규칙적이며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의 보편성은 고정되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서 변화할 뿐 불변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최초 인간은 최후 인간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류의 시조(始祖)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인류의 시조(始祖)는 진화론적 측면에서 학자들에 의해 해석한 정의다. 이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다르게 호명되어왔고, 우리는 그것을 의심 없이 학습해 왔다. 시조는 현생 인류의 동류를 인간으로 명명한 것으로 최초의 인간은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부터 시작한다. 호모 에렉투스는 다른 유인원과 다르게 서서 걸어 다니는 동물이라는 의미다. 그 후 이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뜻을 가진 호모 파베르(Homo faber)’에게 최초 인간의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호모 파베르는 인간의 시조에서 밀려나는데, 생각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그 패턴을 이어받는다.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 역시 얼마가지 못했고, 마침내 인간의 시조가 호모 루덴스(Homo Ludens)’로 등극하게 된다. 호모 루덴스라는 최초 인간의 정의는 바로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시조는 '놀이하는 인간'으로서 맹목적으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이 아닌 것으로 놀이를 향유할 줄 아는 문화적 성격을 가진다. 이 문화는 복합적인 놀이로서 단순한 개인의 놀이 이상의 존재 의미를 가지고 문명화된 세계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는 인류의 조상으로서 인간의 삶이 놀이라면 세계는 놀이터인 셈이다. 인류는 이 세계라는 놀이터에서 고도화된 문명을 건설하며 지금의 문화를 형성해 왔다. 그것도 역할과 책무를 분담하며 구성원간의 자극제로서 문명을 건설하면서 종교, 예술, 경제, 정치 등을 성장시켰다. 이처럼 인간의 문명은 급속도로 세계를 건설했는데, 거기에는 오로지 건설을 위한 자연의 파괴라는 인간의 무차별적인 물리적 폭력이 중심에 있었던 것.

문명은 자연을 점점 훼손하면서 문화적 성장을 이룩했지만 재난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 생태계가 보여주고 있는 수많은 재해와 이상 현상은 바로 자연이 주는 재앙이며 이 가운데 인간은 무능한 존재하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 놀이하는 인간은 삶이라는 놀이터에 맹목적으로 초점을 맞춘 것으로 자연이 배제되어 왔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다. 물론 자연과의 상생이라는 미명하에 건설이 이루어졌지만 이 또한 인간의 정치적인 발로일 뿐 진정한 의미의 상생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작금의 현실도 놀이하는 인간의 자연을 소유할 수 있다는 오만과 문명에 대한 욕망에서 기원한다. 인간은 자연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므로 자연을 우위에 두고 인간이 긴밀히 접촉 하는 가운데 문명을 발전시켜야 했다. 이것을 망각한 결과 자연은 인간의 입을 마스크로 가두고 인간의 거리를 멀게 하고 있다.

  인간의 시조가 사후에 직립 인간, 도구 인간, 지혜 인간을 거쳐 놀이 인간으로 불려 왔는데, 이러한 인간 위주의 해석은 변경되어야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가장 현생 인류와 가까운 문화적 인간을 호모 루덴스로 투사한 것이지만 자연을 배반해온 놀이하는 인간은 여러 가지 파행적인 모순과 파국적인 세계를 견인해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코로나 19로 처참한 삶을 살고 있는 삶의 놀이터는 더 이상 인간의 놀이터가 아니다. 하루 빨리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 인간의 놀이터가 아닌 자연의 놀이터로. 그렇게 가기 위해 호모 루덴스는 인간 중심에서 자연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연을 통해 인간을 처음부터 배우는 호모 스튜던트(Homo student)’로 거듭나야 할 때다.

    


                                                                          권성훈  (교양대학  · 문학평론가) 교수


TAG
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