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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등론・평등론・대등론의 변혁적 전망
  • 편집국
  • 등록 2020-12-08 11:3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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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사상을 죽도록 사랑하여 따라쟁이와 같이 남의 사상을 시늉하며 모방하는 소모적인 서양 사상 추수주의자와 서양이 옳다고 하는 비평가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 사상에 대한 비판적 대안이나 창조적 반론은 전개하지 않고, 무턱대고 유행을 타는 풍조가 심각하다. 그 흐름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어서 한국은 그러한 사상 수입국이자 소비처로 전락하고 있다. 더욱이 사상의 유행이나 풍조가 달라지면 새로운 것을 익히느라 허덕대며 마침내 여러 사상의 하수종말처리장처럼 되어버린 우리나라는 탈출구 없는 사상의 도탄에 빠진지 이미 오래이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프랑스 사상가의 저작이 크게 유행하고 회자된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 )라는 인물의 것인데, 사상은 서양 철학의 전통에 입각하여 현대 사회의 인물 군상을 정의하는 방법이 남다르다. 그렇지만 그는 프랑스 사상의 전통 위에 서 있고, 여러 가지를 혼종시킨 그야 말로 해체주의의 극치이고 사회주의 사상의 요체를 간직하고 있어서 모호하기만 하다. 그의 생각은 단정적으로 말하면 평등주의의 재정의이고, 인민, 시민, 민중 등을 고려한 해방된 주체를 중시하는 것이다. 서양의 지적 전통에 입각하지 않으면, 잘 요해되지 않는 개념들이 구사되고 있으며 췌언이 너무도 많다.

그림을 크게 그려보자. 고대, 중세, 근대의 거시적 관점을 적용하게 되면, 무엇이 문제인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인류는 세계 어디에서나 문명의 전환을 겪으면서 위의 시대 경과를 겪어왔다. 고대는 군사귀족이 판을 치고 자신의 군사적 권능을 미화하면서 오히려 백성들을 차등하는 과점이 제시된 시대이다. 백성은 차별되었으며, 군사적 귀족에 의해서 탄압을 당하였다. 그것은 세계 어디에서나 공통적으로 겪었던 차등이다.

중세시대에도 차등은 여전히 존재하였다. 문명제국이 일어났으나, 문명은 중세의 보편종교가 제공하는 것으로 신 앞에 평등하나 신분적 차별을 겪는 이원적인 구조 속에서 불평등을 겪었다. 보편종교의 교묘한 언사에 차등을 받고, 지식인들의 지식 전유에 의해서 고통을 받는 불균형적인 차등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중세종교의 선악과 현우에 대한 설계와 언설은 교묘하기 이를 데 없고, 많은 부분에서 일반적인 백성을 늑약하는 이상한 형태의 문명을 창출하였다. 그렇지만 문명의 본질은 차등이었다.

근대에 이르러 차등을 극복하는 평등론을 제기하게 되었다. 평등론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에서 갑자기 제안되었으며, 이들 차등의 핵심은 자본주의와 중세주의에 있었음을 더할 나위없다. 평등론은 각별한 사상이었으며, 18세기경에 제안되고 마침내 민주주의를 완성하면서 새롭게 진전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백성이 주권을 가지고 인권 속에서 평등을 가지는 것이 근대의 산물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많은 문제가 없지 않다.

귀천현우빈부 등을 결정한 것이 기왕에서 문제된 차등에서 평등론을 제기한 것은 일정한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역동적인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이 서 있는 곳에서 그 자체로 같으면서 다르다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최상의 것과 최하의 것이 서로 맞물려 있으면서 동시에 지위의 역전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긴요하다. 통념을 벗어나서 실제로 달성할 수 있는 최상의 방안이 바로 상생과 상극의 원리를 알아내는 것에 있다.

기존의 발상을 뒤집고 역동적인 관계를 파악하는 주권의 실현이 필요하다. 단순한 주권이 아니라, 누구나 지위를 역전하고 사태를 반전하며 가장 창조적인 능력을 실현하는 창조주권이어야 한다.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대등하고, 대등하므로 서로 갈등하고 화합할 수 있다. 억지 주장이나 머저리 같은 생각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진정한 창조력을 자아내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제안이다.

거시적으로 보니 세 가지 이념의 변천이 요체이다. 고대와 중세의 차등론을 극복하고 근대의 평등론을 제시하였으나, 이제 평등론은 한계에 도달하였다. 개인의 평등만을 말하면서 평등 속에 감추어진 억압의 실체가 드러났다. 민주주의라는 것의 실체는 표결과 다수결의 흠결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삶을 누릴 수 있으며, 그것이 선이고, 그 선을 통해서 창조적인 주권을 시행할 수 있다. 그것이 대등론이다. 이제 대등론을 구현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사람은 저마다 잘났으면서 못났다. 인정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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