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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 그 본질
  • 편집국
  • 등록 2020-06-09 09:31:33
  • 수정 2020-06-09 09: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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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세잔의 거작의 탄생을 음미해 보면 재미있는 점이 많이 있다. 폴 세잔은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20세기의 거장으로서 1839년에 태어나서 1906년 동안 화가로 활동하였다. 초창기에 세잔은 젊은 인상주의 작가들이 모여들던 카페 게르보아(Cafe Guerbois)에서 마네, 피사로, 르누아르 등과 같은 미술가들과 교류를 하였다. 대개 폭력적인 주제가 많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흑백의 강렬한 대조를 보여주어 인간이 가진 공포감과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세자니즘을 시도해서 것은 많은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Autopsy, 1869). 폴 세잔은 너무도 유명한 작가였기 때문에 그의 세계를 문외한인 건축공학도가 언급하는 것을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우울했던 시절을 상기하는 것도 나에게 좋은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살롱전에도 여러 번 출품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그의 친구인 에밀 졸라는 <</span>작품>이라는 소설을 발간하면서 소설 속에서 이번에도 망쳤어 난 아무것도 그릴 수 없을 거야라고 하며 실패한 사람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속의 세잔은 사물들을 좀 더 사색하면서 물체나 각과 면들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중심점으로 모인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자연은 자신에게 넓이 보다는 깊이로 다가온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이 발견이 그를 백팔십도 다른 화가로 탄생시켜 주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의 중독적 노력을 되새겨보고 싶다. 세잔은 <</span>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작품을 5점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는 성인남성의 실제 키만큼 크기로 그렸고 실제 카드를 치는 사람들은 카드는 치지 않고 시늉만 내고 있게 묘사한 느낌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인터넷으로나 볼 수 가 있었다. 매우 신기한 시선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작품은 교묘한 시선들의 처리로 인해서 얽혀진 잘못될 길에 쉽게 빠져드는 인간의 묘사가 없고 그냥 카드에 집중하는 척 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이는 조루즈 드 라 투르의 <</span>다이아몬드 에이스를 가진 사기꾼>과 사뭇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또한 구경꾼 아이도 없어졌으며 그림은 절반크기로 줄였다. 왜 그런가 알아봤더니 세잔은 이 카드놀이를 그리기 위해서 무려 150점 이상의 스케치를 그려댔다고 한다. 많은 다른 미술가처럼 그도 분명히 무언가를 찾기 위해 중독적인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실제 카드의 형상은 세 번째부터 등장한다. 주변에는 술잔하나 없고 술병과 두 사람 만이 않아 카드에 집중 하고있다. 우측사람은 밝게 처리했고 좌측사람은 어두운 톤으로 처리했으나, 입에 문 담배를 흰색으로 그림으로써 관객이 둘 다 공평히 바라볼 수 있도록 유혹적인 배려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세잔도 여기서 제한된 집중과 선택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제한된 집중의 힘으로 인해서 대 작품이 터진 것이다. 이 작품은 전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싸게 팔린 작품으로 하나는 오르세에 보존되어 있기도 하지만 한 점은 카타르의 어느 공주가 2,900억 원을 주고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잔은 다시 한번 집중하여 네 번째 작품을 그렸는데 더 집중한 결과 그림은 73센티미터 까지 줄었다. 마지막 <</span>카드놀이하는 사람들>5번째 작품은 그 크기를 57센티미터까지 줄였다. 본질의 가장 중요한 핵심만을 남겨놓아야 했다. 물론 카드색깔도 다 없앴다. 그래야 집중하는 것이고 그래야 본질이 남는 것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하였을 것이다.

 저를 포함한 우리구성원 모두도 본질을 알고 본질적인 힘을 만들기 위해서 제한된 집중을 쏟아 붙는 지혜가 필요한 긴장의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사회는 기술 혁명속에서 급변하고 있다. 대학의 강의 패러다임도 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오히려 변화에 대비하며 더욱 많은 준비를 하여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저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도 암흑같이 진한 바다를 뚫는 아픔도 함께 참아가며 포기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노력이 우리 대학사회를 크게 변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최병정  (건축공학과 )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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