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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이 땅에서 세운 서원을 잊지 말자
  • 편집국
  • 등록 2020-06-09 09: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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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가 이 땅에 온 인연과 서원은 절실하다. 얼마 전 조계종에서 사월 초파일 행사를 윤사월 초파일로 옮겨 연등회를 개최하려다 결국 이태원 발 코로나로 말미암아 접고 말았다. 종교는 사람들의 믿음으로 이룩되는 특정한 사회의 산물인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좌절되고 만 것이다. 참담한 일이지만 그나마 법요식을 축소하여 간단하게 치룰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사회가 이러하니 생활적 거리두기를 실천하자는 의미에 동참한 것을 위안삼아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행사와 상관없이 아기 부처가 이 땅에 온 뜻만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만큼 우리에게 절실한 사연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탁월한 시인이자 불교철학자인 아슈바고샤(Ashvaghosa, 馬鳴, 1세기-2세기 중반)가 지은 <<</span>불소행찬(佛所行讚, Buddhacarita)>>이라는 작품에는 부처가 이 땅에 내려온 사연이 절절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특히 부처가 태어난 생품에 대해 쓰여진 구절을 보면 이 생은 부처의 생이 되는 즉, 후생은 가장 자리의 생이 된다. 나는 오로지 이 일생으로 일체중생을 마땅하게 제도하리라’(此生爲佛生 則爲後邊生 我唯此一生 當度於一切)라고 쓰여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한 번의 생으로 주어진 것의 깨달음을 증득하고 후생은 변두리의 삶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자신은 오로지 이번에 주어진 생으로 자신의 깨달음은 물론하고,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제도하겠다는 염원을 세운 셈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고통받는 이들을 구하겠다는 염원이 새겨진 것이다. 하나가 여럿을 위해 살겠다는 거룩한 뜻이 담겨 있다.

남을 위한 삶, 인류를 위한 고뇌와 서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오늘날까지 놀라운 지혜를 전할 수 있는 것이다. 2,600여년이나 앞서 이룩된 깨달음이 여전히 우리 인류의 유산으로 기억되고 있으므로 주목해야만 한다. 우리나라에도 부처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서사시로 논한 작품이 있다. 바로 월인천강지곡이다. 인도아대륙의 정신적 유산이 동아시아 유산으로 발전하고 승계되었다.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세계의 정신문화유산으로 거듭 확대되었다.

월인천강지곡의 특정 대목에는 아버지 정반왕과 실달타 태자의 생각이 전혀 다른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태자가 칠보로 꾸민 대궐에서 많은 아들을 데리고 네 천하(四天下)를 다스리는 것은 아버님 정반왕의 뜻이니/정각을 이루어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밝게 하는 것이 아드님 실달타 태자의 뜻이시니라고 하였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이 네 천하를 다스림으로 인해 정치적인 권위와 세속적인 영예를 누리려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아들은 바른 깨달음을 이룩하여 삼천대천세계의 어두움을 타파하고 우주 궁극의 뜻을 밝히려는 것이 목표였다. 세속의 명리를 추구하지 않고, 인류와 우주의 전체적인 각성을 핵심으로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부처의 삶은 무엇이 우리에게 진정한 삶이 되는가 거듭 반문하게 한다. 자신의 이익이나 혈족의 이기에 갇혀서 온갖 명리를 추구하는 자들의 흐려터진 세계가 허망한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례들이 점점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음도 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어지러운 세상에 고통받는 이들에게 자비의 눈길을 주는 일에는 방관한다. 이 깊은 타락이 넘쳐나는 세상을 어찌할 것인가? 선을 가장한 악이 넘쳐나고 정의를 앞세워 횡행하는 부정이 너무나 많다.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을 대신할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이 못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악이 선을 대변하고, 부정이 정의를 대신하는 이 세상의 타락에 영성과 각성을 통해 강력한 힘을 드러내는 부처의 가르침이 되살아나기를 바란다. 그가 서원을 세우고 죽음도 가릴 수 없는 깊은 차원의 고뇌를 해소하려던 일은 비단 당대에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넘쳐나는 세상의 타락을 멈추고 새롭게 해결하려는 혁신적인 결단이 바로 부처의 서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전통 속에 살아 있는 부처의 삶은 세상이 더욱 타락하고 악으로 물들었을 때에 참다운 가치를 발현한다.

하나의 즐거움이 곧 하나의 슬픔이고, 하나의 슬픔이 곧 하나의 즐거움이 된다는 것을 다시 상기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자비심을 가져야만 한다. 괴로움은 덜어주고 즐거움을 주고자하는 위대한 결단이 곧 자비이고, 중도이며, 새로운 가치임을 알아야만 한다. 코로나 질병이 우리를 괴롭히는 가운데 자비의 마음으로 여러 가지 희생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부처이다. 지금 우리는 내 삶의 쓰임을 생각하며 세상과 소통하고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바로,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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