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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민족적 정체성과 세계적 보편성
  • 편집국
  • 등록 2019-11-11 10:04:16
  • 수정 2019-11-11 10: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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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31일은 할로윈 축제의 날이었고 그 축제가 밤새 이어져 이튿날인 111일 새벽 5시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고 한다. 할로윈의 날은 세계적 축제의 성격이 있으며 이제 상업적으로 중요한 날이 되어서 젊은이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지게 하니 자못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얼굴에 흉악한 분장을 하고 죽음의 사신들을 쫓아내려는 마음의 셈법으로 그럴 듯하게 꾸미고 다니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집에 귀가하는 모습을 우연하게 보게 되어 그 젊은이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이들이 기리는 축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 놀이를 강조하는데, 이 놀이에 맞서는 우리 놀이와 축제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그 전망이 암당하기만 하다. 전망 부재의 우리 축제를 되찾아야 할지 갑갑하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하여 보자. 우리의 한류의 기류에 동조하여 K-POP을 구경하러온 이들에 대하여 저마다의 주체성이나 정체성이 없다고 나무라면서 이와 같은 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우리 것을 팔아먹고 동조하고 공감하면서 소통하게 하고, 오히려 이에 버금가는 일을 하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비난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이 진실로 바람직한 태도인가 하는 의문이 앞서게 된다. 민족적 정체성과 세계적 보편성은 이처럼 서로 분리되지 않는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망각하고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도 않으며 바람직한 민족적 정체성을 추구하는 태도도 더욱 아니다.

이제 지구는 하나의 단일한 문화적 권역으로 묶이고 있으며, 아울러서 문화의 국적이나 정체성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문제는 융합이나 복합의 출발점을 어디로 삼아 어떻게 버무리고 이를 자신의 밑천으로 삼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여야 한다. 자신의 터전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민족적 정체성을 확산의 준거로 하고, 이를 확대하고 발전시켜서 남의 것을 가지고 와서 비벼 만드는 데서 보편성의 확대와 심화의 과정으로 삼아야만 한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혼종과 변종, 잡종과 순종의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세계적 고아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낡은 관점을 강조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현재 국제 미아와 같은 처지에서 만들어진 이상한 문화에 너무나 익숙하다.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 넘쳐나는 제1세계 자본주의 사회의 꽁무니에 서서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지만 영원하게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문화적으로 남의 꽁무니에서 뒤쫓을 일은 아니다. 뒤로 돌아서서 새로운 길을 향하여 각자 뛰기 시작하면 세계 전체의 일등이 되고 선두에서 남을 이끌 수 있다. 자신의 전통과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헛된 명분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길을 찾아서 이를 모색하면서 실패하면서 배우는 슬기가 있어야 마땅하다.

각각의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제4세계의 민족주의 관점을 가져야만 새로운 전망을 할 수가 있으며, 게다가 지구촌의 모든 인류가 저마다 문화적으로 평등하고 훌륭하다고 하는 관점이 가장 화급하게 요청되는 식견이다. 할로윈의 축제가 아이티 섬의 게데(Guédé) 축제, 동아시아의 우란분재(盂蘭盆齋) 또는 백중 등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한 전통이 세계 각국에 널리 분포하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공유하고 동시에 축제의 장으로 구체화하는 문제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오히려 할로윈 축제는 거의 상업화된 것으로서 그렇게 원래의 죽은 자들을 위한 축제의 성격에서는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는 점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문화를 대등하게 보지만 이들 문화의 창조 저변에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마음의 준거가 가장 중요한 점을 알아야 한다. <</span>중용>이라는 책에 마음이 없으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고 하였다. 이 말은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으며 사고의 패턴이 보편적으로 같은 말이기도 하다. 프랑어식으로 말한다면 ‘regard sans voir’, 영어식으로 말한다면 ‘look without see’라고 하는 표현도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진정으로 문화를 보고(), 알아보고(), 살펴보아야만() 한다.

문화의 민족적 정체성이 곧 세계적 보편성으로 가는 지름길이 다른데 있는 것은 아니다. 민족적 정체성을 세계적 보편성으로 만들고 다른 문화적인 범람을 휘어잡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융복합시대에 문화적 주체성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문화 교육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행방불명된 우리의 전통과 문화는 마땅히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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