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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의 산실 정동을 가다
  • 임진우 기자
  • 등록 2018-05-21 09: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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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년에서 1896년으로 떠나는 여행
최근 남북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우리나라의 긍정적인 미래가 예상된다. 하나의 민족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남북이 나뉘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땠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근대문화의 중심지가 됐던 정동 일대를 찾아가봤다.



외래문화가 공존하던 정동

 

 정동의 이름은 ‘조선왕비의 정릉이 지금의 정동에 있던 것’에서 정릉동이라 부르며 시작하게 됐다. 19세기 다양한 나라의 공사관이 밀집해있던 정릉은 자국의 문화를 전파하기 위한 서구의 움직임이 시작된 곳이다. 이외에도 △정동교회 △이화여고 △배재학당 등이 있어 기독교 전파와 교육 사업을 목표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주요무대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 현재 정동은 우리나라 근대문화 형성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정동은 본교 서울캠퍼스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편한 방법을 원한다면 서대문역 사거리 정거장에서 600번 혹은 602번을 탑승한 후, 두 정거장 뒤인 광화문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정류장에서는 도보로 600m 정도만 이동하면 쉽게 정동에 도착할 수 있다. 수원캠퍼스에서는 다소 멀지만 8800번 버스를 이용하면 환승할 필요 없이 올 수 있다. 경기대후문 정류장에서 버스를 탑승한 후 45 분가량 이동해 시청역 정류장에서 내리면 도보로 900m정도 거리에 바로 정동이 있다.

 

 


1896년 아관파천 - 구 러시아 공사관

 

 서대문역 5번 출구에서 처음 도보로 향한 곳은 정동공원에 위치한 ‘구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신분에 위험을 느낀 고종이 세자와 함께 1년가량 피신한 곳으로 흔히 ‘아관파천’이라고 부르는 사건의 현장이다. 러·일 전쟁과 을사늑약을 거치면서 공사관으로서 기능이 크게 축소됐음에도 1949년까지 공사관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 건물이 크게 파손돼 대다수가 소실됐고 몇 차례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는 망루만 남아 있는 상태다.

 

 기자는 구 러시아 공사관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똑바로 가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럴듯한 안내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막상 도착해 공사관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도 ‘이게 뭐지?’라는 생각과 함께 어안이 벙벙했다. 덩그러니 남아있는 건물 한 채는 과거 한 나라의 대표 가 머물러있던 곳이라고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나라의 아픔을 안고 있는 곳이지만 현재의 초라한 모습에서 더 이상의 소실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905년 을사늑약 - 덕수궁 중명전

 

 홀로 쓸쓸하게 남아있는 공사관을 뒤로한 채 기자는 덕수궁 중명전 으로 향했다. 덕수궁 중명전이라는 이름 때문에 처음엔 덕수궁으로 향했었는데 알고 보니 중명전은 덕수궁 밖에 위치해있었다. 예전에는 경운궁 1) 안 평성문 2) 밖에 위치했지만 일제가 덕수궁 권역을 축소하기 위 해 도로를 만들면서 궁 밖에 위치하게 된 것이었다. 덕수궁의 황실 도서관으로 사용된 서양식 건물 중명전은 주위에 위치한 한옥들과는 다르게 개성 있는 모습을 띄고 있다.

 

 중명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이기도 한데 현재는 을사늑약 체결 당시의 현장이 복원돼있다. 특히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이토 히로부미’의 모형이 을사늑약을 주도한 인물로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또한 중명전은 1907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곳이기도 해서 고종이 보내는 칙서에 도장을 찍는 체험도 할 수 있었다. 눈에 띄는 도장이었음에도 결국 만국평화회의에 전해지지 못한 우리나라의 억울함이 담겨있는 듯 했다.

 

1) 덕수궁의 옛 이름         

2) 덕수궁의 서쪽 문으로 현재는 이용이 불가하다

 




1919년 3·1운동 - 이화박물관

 

 3·1운동하면 대부분 유관순 열사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바로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이화학당을 재현해 놓은 ‘이화박물관’이다. 이화학당은 1886년 해외여성선교회에서 파견된 메리 F. 스크랜튼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여성교육기관이다. 그녀는 ‘한국 여성들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 양성하는 것’이라는 교육신념을 갖고 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이화학당은 120년 이상의 역사동안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등을 설치하며 다방면으로 발전하게 된다.

 

 현재 박물관에는 유관순 열사가 사용했던 교실의 모습이 그대로 복원돼 있다. 또 그동안 바뀌어왔던 이화여고의 교복, 역대교장 등을 통해 이화학당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기도 하다. 특히 교실 앞 칠 판 위에 걸려있는 태극기와 뒷문으로 나가면 볼 수 있는 당당한 모습의 유관순 열사 동상은 우리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시켜준다.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 경교장

 

 마지막으로 향한 경교장은 백범 김구 선생이 1945년부터 암살당한 1949년 6월 26일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현재는 김 구 선생이 사용하던 모습을 복원해 당시의 △침실 △서재 △응접실 등을 볼 수 있다. 기자가 본 생활 공간들은 예상보다 화려하지 않은 모습 이었는데 이는 아마 김구 선생의 소박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외에도 경교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첫 국무위원회가 개최된 장소이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 중 하나로 불렸다. 이런 임시정부의 활동을 보여주듯 지하에는 속옷에 쓰인 밀서, 신탁통치 반대 전단지 등이 전시돼 있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한 선조들의 얼을 엿볼 수 있었다.


근대문화의 재탄생, 정동야행

 

 우리나라의 근대문화탐방을 마친 후 매년 봄과 가을 정동일대에서 △다양한 볼거리 △공연 △전통 문화체험의 기회(자수, 수공예)를 제공 하는 정동야행을 볼 수 있었다. 기자가 중명전을 나서자 마침 6시가 조 금 넘어 운이 좋게도 근대복식 퍼레이드 ‘정동야인’이 진행되는 중이었 기 때문이다. 근대복식을 입은 서양인들과 한복을 입은 한국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근대문물이 유입되던 당시의 정동을 재현해놓은 모습이 펼쳐졌다. 또한 근대외교관과의 연회를 보여주는 ‘정동연회’에서는 차를 대접하는 시연 및 체험, 근대외교관 복식체험 등이 진행됐다. 정동 탐방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사전신청을 통해 ‘다 같이 돌자 정동 한 바퀴 투어’, ‘덕수궁 석조전 투어’ 등의 가이드도 받아볼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정동은 아관파천을 비롯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우리나라 근대문화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나 라의 밝은 미래가 예상되는 현재, 과거의 모습이 어땠는지 알고 싶다면 지금 당장 정동으로 가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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