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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4-17 11: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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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온 광복, 오지 않은 평화

 1945년 광복 이후, 우리나라는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일본 군의 철수 이후 외지에 나가있던 6만여 명의 주민들이 일시에 귀환하면서 더욱 열악한 환경이 계속됐다. 혼란 속에서 당시 우리나라를 통치하던 미군정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채 오히려 사리사욕을 채우는 행실을 보여 상황을 악화시켰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47년 3월 1일의 사건을 기점으로 제주 4·3사건이 시작됐다.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 행사 도중 군중들 사이에서 기마경찰의 실수로 아이가 말굽에 채이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이 해당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고, 이를 지켜 보던 경찰들은 군중을 향해 총을 쐈다. 결국 이 날 총에 맞은 6명이 사망하고 만다. 이 사건은 ‘경찰의 과잉대응’이라는 지적을 받으며 민심을 격앙시켰다. 이후 제주도 내에서 경찰의 만행을 규탄 하는 운동과 함께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합동파업이 일어났다. 파업 참여자들은 △3·1 발포 사건 사과 △발포자·책임자에 대 한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을 주장했다. 그러나 중앙정부였던 미군정은 이러한 요구들을 무시하고 사태를 좌익 세력의 모함이라고 몰아갔다. 그리고 파업 본부를 습격하거나 파업 참여자들을 잡아가는 방식으로 사건을 무마시키려고 했다.

투쟁 이후 폐허가 된 삶의 터전

 미군정의 탄압 이후 제주도 내 좌익 세력을 이끌던 남조선로동 당 제주도당(이하 남로당)은 격앙된 민심을 기회삼아 대규모 무장 투쟁을 계획한다. 그렇게 1948년 4월 3일에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봉기가 발생한다. 그들은 국가가 행하는 탄압을 중지하기를 요구 하며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지만 협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5월 10일에 남한 단독 정부설립을 위해 전국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으나 유일하게 제주도만이 선거를 거부했다. 남한과 북한에서 개별적인 정부가 설립되는 것에 대한 반대의 의미였다.

 이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인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제주도경비사령부를 파견했다. 그리고 제주 해안선으로 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무허가 통행을 금지한다고 밝힌 지역은 해변을 제외한 중 산간마을1) 전부를 포함하기에 사실상 그 포고문은 수많은 제주도 민들의 거주 금지를 의미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등이 추가로 이뤄져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으며, 1954년 9월 21일에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돼 민간인들에 대한 접근금지 제한이 풀리고 나서야 4·3사건이 잠정적으로 종결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제주도민 8 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7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4·3사건 발생 70주년을 맞아 이를 추념하기 위한 전국 단위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먼저 제주도에서는 올해를 ‘제주 방문의 해’로 설정한 뒤 △4월 3일 지방공휴일 추진 △4·3사건 역사유적 수학여행 코스 개발 △4·3 평화기행 등의 사업을 진행했다. 광화문에서는 이번 달 3일부터 7일까지 광화문국민문화제가 열렸고, 수원을 포함한 전국 20여 곳에는 4·3 분향소가 안치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 대해 시민 김도담(직장인·27세) 씨는 “국가차원의 노력은 물론 긍정적이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국민들이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한 현재 국회에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이 발의 된 상태다. 본 법안은 2000년에 공포된 것으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를 편성해 희생자 및 유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담고있다. 하지만 본 법안은 2000년 이후로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고 시위에 참여했다가 수감당한 이들의 후속처리가 미흡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번에 발의된 개정안에는 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수형인의 군사재판을 무효화하는 내용이 새로 담겼다. 더불어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명예훼손이 발생할 시 강하게 처벌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하지만 현재 3월 임시국회에서도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은 상태고, 4월 임시국회에서도 진전이 없다. 본교 김준호(행정·2) 군은 “국회에서 여·야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래도 국회에서 관련 법안에 관심을 많이 가져줘야 한다”는 의견을 전했다.

1) 표고 200m 등고선에서 표고 600m 등고선 사이의 지역


[덧붙이는 글]
제주 4·3사건은 대한민국의 민주화과정에 긴밀히 얽힌 사건이고, 우리 땅에서 벌어진 우리 모두의 역사다. 4·3사건이 비단 제주도에 한정된 사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다 함께 이 참사를 기억하고 치유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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